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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고프던 어린 시절이 지금은 왜 이렇게 그리워

    태그 (1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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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킹멘트 (300자 내외)

    "엄마, 배고파..." 그 한마디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쌀뜨물에 소금 한 줌 타서 배를 채우고, 보리밥에 고추장 쓱쓱 비벼 먹던 그 시절. 그렇게 배고팠는데, 왜 지금은 그때가 그리운 걸까요? 허리띠 졸라매며 살았지만, 가족이 둘러앉아 나눠 먹던 따뜻한 밥 한 그릇. 오늘은 그 시절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눈시울이 붉어질지도 모릅니다.

    디스크립션 (300자 내외)

    1960~70년대, 보릿고개를 넘던 그 시절의 진솔한 이야기입니다. 배는 고팠지만 마음만은 따뜻했던 시절, 한 아이의 눈으로 본 가족의 사랑과 희생을 담았습니다. 어머니가 몰래 당신 밥을 덜어주시던 모습, 아버지가 빈 도시락을 들고도 웃으시던 그 미소. 가난했지만 서로를 아꼈던 그 시절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듣다 보면 어느새 눈물이 흐를지도 모릅니다.

    ※ 보리밥 한 그릇의 무게

    자, 여러분. 오늘은 제가 참 오래전 이야기 하나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지금 들으시는 분들 중에 보리밥 드셔보신 분 계십니까? 그것도 쌀 한 톨 안 들어간, 새까만 보리밥 말입니다. 요즘엔 건강식이라고 일부러 찾아 먹는다지만, 그때는 그게 아니었어요. 먹을 게 그것밖에 없었으니까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겁니다.
    1967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한 60년 가까이 된 그 봄날이었습니다. 보릿고개라는 말 들어보셨죠? 전년도 가을에 수확한 양식은 다 떨어지고, 올해 보리는 아직 익지 않은 그 지독한 봄. 그때 우리 집 식구는 일곱이었어요. 할머니, 부모님, 그리고 우리 남매 넷. 아버지는 날품팔이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셨고, 어머니는... 어머니는 참 그때 어떻게 그 많은 식구를 먹였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합니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어요.
    그날도 저녁상이 들어왔어요. 커다란 양푼에 보리밥이 수북하게 담겨 있고, 반찬이라곤 된장 한 종지, 고추장 한 종지가 전부였습니다. 김치도 없었어요. 김장 김치는 진작에 다 떨어졌고, 봄나물이라도 뜯어올 수 있으면 다행이었는데 그날은 그마저도 없었던 겁니다. 날씨가 추워서 아직 나물도 제대로 돋아나지 않았거든요.
    할머니가 먼저 숟가락을 드셨어요. "자, 어서 먹어라. 식기 전에." 그 말씀에 우리는 후루룩 밥을 퍼 담았습니다. 양푼에 숟가락을 넣는 소리가 덜그럭덜그럭 났어요. 서로 더 많이 퍼 담으려고 눈치를 보면서도, 동생들한테는 더 많이 주려고 애쓰던 그런 묘한 분위기였습니다.
    보리밥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는데, 참 거칠었어요.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 걸걸하고, 씹으면 씹을수록 텁텁했습니다. 쌀밥처럼 보들보들하지도 않고, 달지도 않았어요. 그냥 거칠고 뻑뻑한, 그런 밥이었습니다. 하지만 배는 고팠으니까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기다린 밥이었으니까요. 고추장을 한 숟가락 듬뿍 떠서 밥에 쓱쓱 비벼 먹었어요. 매운 맛에 눈물이 핑 돌았지만, 그래도 먹었습니다.
    동생들도 마찬가지였어요. 다들 아무 말 없이 밥만 퍼먹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떠들썩했을 저녁 식사 시간이 그날따라 조용했어요. 다들 배가 고파서 말할 힘도 없었던 거죠. 오직 숟가락 소리만 덜그럭덜그럭 울렸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상한 게 있었어요. 어머니 밥그릇이 유독 적다는 거였습니다. 우리 그릇에는 밥이 수북한데, 어머니 그릇만 반도 안 차 있었어요.
    "엄마는 안 드세요?" 제가 물었어요. 그랬더니 어머니가 웃으시면서 말씀하셨죠. "아이고, 엄마는 아까 밥 먹다가 배불러서 그래. 요리하면서 이것저것 먹었더니 배가 불러서 말이다. 너희들이나 실컷 먹어라." 그때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어요. 어린 마음에 '아, 엄마가 배불러서 안 드시는구나' 했던 겁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바보 같은 일이지요. 밥 먹다 말고 배부를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더군다나 요리하면서 먹을 게 뭐가 있었겠어요? 보리밥 날것을 먹었을 리도 없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땐 몰랐어요. 우리는 그저 배고팠고, 밥이 있다는 게 감사했을 뿐이었습니다. 아버지도 말없이 밥을 드셨고, 할머니도 천천히 숟가락을 움직이셨어요. 그렇게 저녁 식사는 조용히 끝이 났습니다. 밥 한 그릇에 담긴 무게를, 그 안에 숨은 사연을, 우리는 그때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 어머니의 빈 밥그릇

    그날 밤이었습니다. 화장실 가려고 일어났다가 부엌 쪽에서 소리가 나는 게 아니겠어요? 누가 밤중에 부엌에서 뭘 하나 싶어서 살금살금 가봤더니,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가 찬장 앞에 쪼그리고 앉아계셨어요. 달빛이 창문으로 살짝 들어와서 어머니 뒷모습이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시는 걸 보니까, 양푼에 남은 보리밥을 차가운 물에 말아서 드시고 계셨던 겁니다. 반찬도 없이요. 그냥 맨밥에 물만 부어서 후루룩후루룩 드시고 계셨어요.
    저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아, 어머니가 저녁을 안 드신 게 아니라 못 드신 거구나.' 그제야 깨달았어요. 어머니는 늘 당신 밥을 덜어내셨던 겁니다. 우리한테 조금이라도 더 먹이려고요. 그러고도 모자라서 밤중에 남은 밥을 물에 말아 드시고 계셨던 거예요. 그것도 소리 안 나게, 우리가 모르게 말입니다. 혹시라도 우리가 깰까 봐 조심조심 드시고 계셨던 겁니다.
    어머니는 차가운 밥을 한 숟가락 뜨셨다가 멈추시고, 또 한 숟가락 뜨셨다가 멈추시고 그러셨어요. 마치 그마저도 아까운 듯이 말입니다. 어쩌면 그걸 내일 아침에 드시려고 남겨두시는 건지도 몰랐어요. 그 모습이 얼마나 처연해 보이던지요. 우리 어머니가, 그렇게 강하시던 어머니가, 밤중에 혼자 차가운 밥을 물에 말아 드시고 계시다니.
    저는 차마 어머니를 부를 수가 없었어요. 부르면 어머니가 놀라실 것 같았거든요. 그리고 부끄러워하실 것 같았어요. 자식들한테 배불리 못 먹이고 당신은 밤중에 남은 밥으로 연명하신다는 걸 들키셨다는 부끄러움 말입니다. 그래서 그냥 돌아왔습니다. 발소리 안 나게 조심조심 뒷걸음질 쳐서 방으로 들어왔어요.
    방으로 들어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을 울었어요. 소리 안 나게 울었습니다. 동생들 깰까 봐, 부모님 들으실까 봐 이불 속에서 눈물만 주룩주룩 흘렸어요. '엄마, 미안해. 엄마 배고프신 줄도 모르고 나는 밥 더 달라고 했어. 엄마, 미안해.'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들었거든요. 아까 저녁에 제가 밥을 더 달라고 했던 게 생각났어요. 어머니가 "너무 많이 먹으면 배탈 난다" 하셨는데도 저는 "괜찮아요, 배고파요" 하면서 한 그릇 더 받아먹었거든요.
    그 다음날부터였습니다. 저는 밥을 덜 먹기 시작했어요. 어머니가 "왜 안 먹냐, 더 먹어라" 하셨지만, 저는 "배불러요" 하고 숟가락을 놓았습니다. 진짜로는 배가 고팠지만,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더 드셨으면 하는 마음에 그랬던 겁니다. 제가 덜 먹으면 그만큼 어머니가 더 드실 수 있잖아요.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에요. 밥을 덜 먹어도 배가 안 고팠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배는 고팠는데도 마음이 편했어요. 어머니가 제 밥을 드실 거라는 생각에 말입니다. 밤에 혼자 차가운 밥물을 드시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말입니다. 그게 저를 견디게 해줬어요.
    며칠이 지나고, 어느 날 저녁이었어요. 어머니가 제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큰애가 언제 이렇게 컸노. 어머니 마음을 다 아네." 그때 어머니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어요. 저도 눈물이 났고요. 우리는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서로를 껴안았습니다. 말이 필요 없었어요. 다 알고 있었으니까요.
    밥 한 그릇을 놓고 밀고 당기던 그 시절,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아꼈던 겁니다. 말로 하지 않아도, 다 알았어요. 배고프다는 말 한마디가 얼마나 무거운지, 밥 한 숟가락이 얼마나 소중한지 말입니다. 그게 바로 가족이었고, 사랑이었습니다.

    ※ 아버지의 빈 도시락

    자, 이제 아버지 이야기를 해드려야겠습니다. 아버지는 그때 건설 현장에서 막노동을 하셨어요. 새벽같이 나가서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돌아오셨는데, 그 고된 일을 하시면서도 늘 웃으셨습니다. "괜찮다, 괜찮아. 우리 자식들 배불리 먹일 수 있으면 되지 뭐." 그렇게 말씀하시곤 했어요. 힘든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시는 게 역력했습니다.
    아버지는 아침 일찍 나가셨어요.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서 세수하시고, 낡은 작업복을 입으시고, 현장으로 향하셨습니다. 겨울이면 어둠 속에서 출근하시고, 여름이면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까지 일하셨어요. 시멘트 자루를 나르고, 벽돌을 옮기고, 땅을 파는 그런 힘든 일이었습니다. 한창때 남자분들도 하루 종일 하면 녹초가 되는 일이었죠.
    어머니는 매일 아침 아버지 도시락을 싸주셨습니다. 그 도시락이라는 게 뭐 대단한 게 아니었어요. 알루미늄 도시락통에 보리밥 한 통 가득 담고, 된장 조금, 고추장 조금 싸주시는 게 전부였습니다. 반찬이라고 해봐야 무말랭이 몇 조각이나 짠지 한두 쪽 정도였죠. 가끔 김치가 있으면 그게 최고의 반찬이었어요. 그런데 어머니는 그 도시락을 싸실 때마다 한숨을 쉬셨어요. "이걸로 하루를 어떻게 버티시나..." 하시면서요. 보리밥 한 통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 고된 노동을 견디셔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있잖아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요. 아버지는 그 도시락을 혼자 다 드시지 않으셨대요. 현장에 가면 아버지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이 있었던 겁니다. 집에서 아예 도시락을 못 싸오는 사람, 아침도 굶고 온 사람들 말입니다. 아버지는 그런 사람들 보시면 당신 도시락을 나눠주셨어요. "야, 이거 먹어. 나는 아침에 많이 먹어서 배불러." 그렇게 말씀하시면서요.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었죠. 아버지도 아침에 보리밥 한 그릇이 전부였으니까요.
    함께 일하시던 박 씨 아저씨가 나중에 우리 집에 오셔서 그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형님, 그때 형님이 주신 그 밥 한 술 한 술이 제 목숨을 살렸습니다. 집에 애가 셋인데 먹일 게 없어서, 저는 굶고 나왔거든요. 근데 형님이 당신 밥을 나눠주시는 거예요. 제가 사양했죠. '형님, 형님도 배고프실 텐데요' 했더니, 형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아십니까? '괜찮아, 나는 집에 가면 또 먹으면 되지. 자네는 힘들어 보이네. 어서 먹게' 하시더라고요."
    박 씨 아저씨는 그 이야기를 하시면서 눈물을 글썽이셨어요. "형님 덕분에 제가 그 힘든 시절을 버텼습니다. 형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쓰러졌을 거예요. 몸도 몸이지만, 마음이 무너졌을 겁니다. 그런데 형님이 밥을 나눠주시면서 말씀하셨어요. '우리가 서로 돕고 살아야지. 혼자는 못 버텨' 하시면서요. 그 말씀이 저한테는 밥보다 더 큰 힘이 됐습니다."
    그 말을 들은 어머니가 눈물을 뚝뚝 흘리셨어요. 아버지는 집에 오셔서도 "배불러서 못 먹겠다" 하시면서 밥을 조금만 드셨거든요. 우리는 아버지가 힘든 일 하시느라 입맛이 없으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겁니다. 아버지는 낮에 도시락을 나눠주시고, 집에 와서도 우리한테 더 먹이려고 당신은 적게 드셨던 거예요. 하루 종일 고된 노동을 하시면서도 말입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제가 아버지 도시락을 들고 현장까지 찾아간 적이 있어요. 아버지가 도시락을 집에 두고 가신 거예요. 허겁지겁 뛰어가서 현장 입구에서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아버지! 도시락이요!" 그런데 아버지가 달려오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어이고, 됐다 됐어. 그냥 집에 가져가거라. 아버지 배 안 고파." 하시는 거예요. 땀을 뻘뻘 흘리시면서 말입니다.
    저는 그때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일부러 두고 가셨다는 걸요. 우리한테 조금이라도 더 먹이려고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울면서 말했어요. "아버지, 이거 안 드시면 저도 안 먹을 거예요. 제가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점심시간에 꼭 드세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껄껄 웃으시면서 제 머리를 쓰다듬으셨습니다. "그래, 알았다. 아버지가 잘 먹을게. 우리 큰애 효자네, 효자야." 그리고는 도시락을 받아 드셨어요.
    하지만 저는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그 도시락을 또 누군가와 나누실 거라는 걸요. 그게 우리 아버지니까요. 당신이 조금 더 배고프시더라도, 옆 사람이 힘들어하면 못 지나치시는 분이니까요. 그게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도시락 하나로 당신 배만 채우신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의 마음까지 채워주셨던 겁니다.

    ※ 고구마 줄기 반찬의 기적

    여름이 되면 그나마 먹을 게 좀 생겼습니다. 산과 들에 나물이 돋아나고, 고구마 줄기를 뜯어올 수 있었으니까요. 어머니는 새벽같이 일어나서 산으로 가셨어요. 호미 하나 들고 광주리 하나 메고 가셔서는 해 뜰 무렵이 되어서야 돌아오셨습니다. 광주리에는 고구마 줄기가 가득했어요. 이슬에 젖어서 반짝반짝 빛나는 푸른 줄기들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산길을 헤매고 다니셨대요. 남의 밭에서 몰래 뜯을 수는 없으니까, 버려진 밭이나 산자락에 자라는 고구마 줄기를 찾아다니셨던 겁니다.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가시덤불을 헤치고, 풀숲을 뒤지고, 때로는 뱀을 만나기도 하셨대요. 손에는 가시가 박히고, 팔다리는 긁혀서 상처투성이가 되셨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내색을 전혀 안 하셨어요.
    그 고구마 줄기를 손질하시는 어머니 손놀림이 얼마나 빠르던지요. 껍질을 벗기고, 질긴 부분을 떼어내고, 적당한 크기로 자르시는데, 그 모습이 마치 예술 같았습니다. 손가락이 춤을 추듯이 움직였어요. 한 줄기 한 줄기 정성스럽게 다듬으시는 모습을 보면, 마치 귀한 재료를 다루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게 말이다, 잘 삶아서 양념 무쳐 먹으면 그렇게 맛있단다. 너희들 입맛에 딱 맞을 거야." 어머니가 말씀하셨어요.
    사실 고구마 줄기가 무슨 산해진미입니까? 하지만 그때 우리한테는 그게 최고의 반찬이었어요. 푸른 채소를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보리밥에 고추장만 먹다가 푸른 나물을 먹는다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아십니까? 우리한테는 그게 명절 음식만큼이나 귀했던 겁니다.
    어머니는 고구마 줄기를 삶으셨습니다. 커다란 가마솥에 물을 붓고 고구마 줄기를 한가득 넣으셨어요. 그리고는 장작불을 때기 시작하셨죠. 뽀글뽀글 끓는 소리가 들리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습니다. 그 냄새가 참 구수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냥 풀 삶는 냄새였을 텐데, 그때는 그게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마당에서 놀던 우리들이 그 냄새를 맡고 부엌으로 우르르 몰려갔을 정도였으니까요.
    삶은 고구마 줄기를 건져내서 찬물에 헹구시고, 물기를 꼭 짜내셨습니다. 그 물기를 짜내실 때 어머니 팔뚝에 힘줄이 불거져 나왔어요. 있는 힘껏 짜내시는 거였습니다. 물기가 많으면 물컹거려서 맛이 없거든요. 그걸 너무나 잘 아시는 어머니였습니다.
    그리곤 양념을 하셨어요. 간장 조금, 고춧가루 조금, 다진 마늘 조금, 참기름 몇 방울. 그게 전부였지만, 어머니 손을 거치면 그게 마법처럼 변했습니다. 쓱쓱쓱 무쳐내시는데, 그 모습을 우리는 군침 삼키며 지켜봤어요. "엄마, 하나만 맛봐도 돼요?" 막내가 물었지만, 어머니는 "안 돼. 저녁 먹을 때 먹어야지" 하시면서 웃으셨습니다.
    "자, 됐다. 이거 먹어봐라." 어머니가 접시에 담아주셨습니다. 우리는 젓가락으로 한 점 집어서 입에 넣었어요. 아, 그 맛이란! 아삭아삭한 식감에 고소하고 짭조름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습니다. "맛있다!" 우리가 소리쳤어요. 동생들도 "엄마, 이거 진짜 맛있어요!" 하면서 연신 먹어댔습니다. 어머니는 그 모습을 보시면서 환하게 웃으셨어요.
    그날 저녁상에는 고구마 줄기 무침이 반찬으로 올라왔어요. 보리밥 한 공기에 고구마 줄기 무침 한 젓가락, 그게 얼마나 꿀맛이었는지 몰라요. 다들 허겁지겁 먹었습니다. 할머니도 "이야, 올해 고구마 줄기는 유난히 맛있네. 어디서 뜯어왔노?" 하시면서 드셨고, 아버지도 "여보, 당신 손맛이 기가 막히오. 이게 무슨 산해진미가 부럽지 않소" 하시면서 밥을 비우셨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 고구마 줄기 무침이 사실은 얼마나 힘들게 만든 건지 우리는 몰랐어요. 어머니가 새벽부터 산을 헤매고 다니신 거, 가시에 찔리고 벌레에 물리면서 줄기를 뜯어오신 거, 그걸 손질하시느라 손가락이 다 부르트신 거. 우리는 그저 맛있게 먹기만 했죠. 지금 생각하면 참 죄송합니다. 그 한 접시에 어머니의 땀과 눈물이 다 들어있었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내색을 전혀 안 하셨어요. 오히려 우리가 맛있게 먹는 걸 보시면서 흐뭇해하셨습니다. "많이 먹어라, 많이 먹어. 이게 몸에 좋단다. 푸른 채소 먹으면 힘이 난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요. 그 여름 내내 우리는 고구마 줄기로 연명했습니다. 삶아서 무쳐 먹고, 볶아 먹고, 국에 넣어 먹고. 같은 재료로 어머니는 매일 다른 맛을 내셨어요. 그게 바로 어머니의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 덕분에 우리는 그 배고픈 여름을 견딜 수 있었던 겁니다.

    ※ 설날의 떡국 한 그릇

    세월이 흘러 겨울이 왔습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어요. 찬바람이 쌩쌩 불어대고, 눈이 펑펑 내렸습니다. 우리 집은 연탄도 제대로 못 때서 늘 춥고 또 추웠어요. 이불을 덮고 누워도 발끝이 시려서 잠을 설쳤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기다렸어요. 설날을 말입니다.
    설날이면 떡국을 먹을 수 있었거든요. 일 년에 딱 한 번, 설날에만 먹을 수 있는 떡국. 그게 얼마나 기다려지던지요. "엄마, 설날 되면 떡국 먹을 수 있지?" 우리가 물으면 어머니는 "그럼, 당연하지. 설날엔 떡국 먹어야지" 하셨어요. 그 말 한마디에 우리는 설날만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설날이 왔어요. 그날 아침, 어머니는 일찍 일어나셨습니다. 부엌에서 뭔가 바쁘게 움직이시는 소리가 들렸어요. 우리도 잠에서 깨서 부엌으로 갔습니다. "엄마, 떡국 끓여요?" 물었더니 어머니가 웃으시면서 "그래, 조금만 기다려. 곧 다 된다" 하셨어요.
    가마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떡을 썰고 계셨어요. 하얀 가래떡을 도마 위에 놓고, 칼로 얇게 썰어내시는데, 그 손놀림이 참 정갈했습니다. "이렇게 얇게 썰어야 국물이 잘 배고 맛있단다." 어머니가 말씀하셨어요. 썬 떡을 끓는 물에 넣으시고, 국간장으로 간을 맞추셨습니다.
    "자, 됐다. 어서 와서 먹어라." 어머니가 부르셨어요. 우리는 달려가서 상 앞에 앉았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국 그릇이 우리 앞에 놓였어요. 하얀 떡이 국물에 둥둥 떠 있고, 계란 지단이 고명으로 올라가 있었습니다. 파도 송송 썰어 넣으셨고요. 그 모습이 얼마나 예쁘던지, 먹기가 아까울 정도였습니다.
    "많이 먹어라. 떡국 먹어야 나이 한 살 더 먹는 거다." 할머니가 말씀하셨어요. 우리는 숟가락을 들었습니다. 후후 불어서 한 술 떠 먹었어요. 아, 그 맛! 구수한 국물 맛에 부드러운 떡의 식감, 계란 지단의 고소함까지. 입안에서 살살 녹는 게 꿈을 먹는 것 같았습니다. "맛있다!" 우리가 외쳤어요.
    동생들도 정신없이 먹었습니다. 후루룩후루룩 국물을 들이키고, 떡을 씹어 먹고, 계란 지단을 건져 먹고. 그렇게 한 그릇을 순식간에 비웠어요. "엄마, 더 주세요!" 막내가 그릇을 들고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웃으시면서 "그래, 그래. 많이 먹어라" 하시면서 한 그릇 더 떠주셨어요.
    그런데 있잖아요, 그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안 사실이 있습니다. 그 떡국을 끓이시려고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말이에요. 떡을 사려면 돈이 필요했는데, 우리 집에는 돈이 없었거든요. 어머니는 남의 집 빨래를 해주시고 품삯으로 쌀 한 되를 받으셨대요. 그 쌀을 들고 떡집에 가서 "이 쌀로 가래떡 좀 바꿔주시면 안 될까요?" 하고 사정사정 하셨답니다.
    떡집 주인 할머니가 딱하게 여기셔서 쌀보다 더 많은 떡을 주셨대요. "아이고, 설날인데 애들한테 떡국은 먹여야지. 이거 가져가소." 그렇게 말씀하시면서요. 어머니는 그 떡을 받아 들고 우셨답니다.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그렇게 해서 우리가 먹은 떡국이었던 겁니다.

    ※ 이웃집에서 나눈 쌀 한 되

    그 겨울, 정말 힘든 시기가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일하시던 현장이 공사를 중단했어요. 겨울이라 날씨가 너무 추워서 일을 못 한다는 거였죠. 그렇게 되니 수입이 뚝 끊겼습니다. 며칠은 그래도 버텼어요. 어머니가 아껴두셨던 쌀이 조금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도 금방 바닥이 났습니다.
    보름쯤 지났을까요. 집에 먹을 게 정말 하나도 없었어요. 쌀도 없고, 보리도 없고, 심지어 고구마 한 개도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쌀뜨물에 소금을 타서 우리한테 먹이셨어요. "이거라도 먹어야 배가 안 고프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요. 하지만 쌀뜨물로 얼마나 버티겠습니까? 우리는 배가 고파서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그날 저녁이었습니다. 어머니가 결심하신 듯 일어나셨어요. "엄마 어디 가세요?" 제가 물었더니, "금방 올게. 걱정 마" 하시고는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어머니가 안 들어오시는 거예요. 밖은 깜깜하고 추운데 말입니다. 저는 걱정이 돼서 밖으로 나가봤어요.
    어머니는 옆집 앞에 서 계셨습니다. 문 앞까지 가셨다가 돌아서시고, 또 가셨다가 돌아서시고. 그렇게 몇 번을 망설이고 계셨어요.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어머니가 이웃집에 쌀을 빌리러 가시려는데, 차마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계셨던 거예요. 남한테 손 벌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때 저는 알았습니다.
    한참을 망설이시더니 어머니가 드디어 문을 두드리셨어요. 똑똑똑. 옆집 아주머니가 나오셨습니다. "어머, 왜 이 밤중에?" 하시는데, 어머니가 고개를 푹 숙이시면서 말씀하셨어요. "죄송합니다만... 쌀 한 되만 좀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아이들이 배고파해서요. 다음 달에 꼭 갚을게요."
    목소리가 떨리고 계셨어요.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울컥했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그렇게 자존심 강하시던 어머니가, 고개를 숙이고 쌀을 빌려달라고 하시다니요. 옆집 아주머니는 잠깐 안으로 들어가셨다가 쌀 한 되를 가져오셨어요. "갚을 것 없어요. 그냥 드리는 거예요. 어려울 때 서로 도와야죠."
    그 말에 어머니가 눈물을 글썽이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몇 번이고 인사를 하시고, 쌀을 받아 들고 집으로 오셨어요. 집에 들어오시자마자 어머니는 그 쌀로 밥을 지으셨습니다. 가마솥에 쌀을 씻어 넣고, 물을 부으시고, 불을 지피셨어요. 밥 짓는 냄새가 온 집안에 퍼졌습니다.
    "자, 밥 먹어라." 어머니가 밥을 퍼주셨어요. 하얀 쌀밥이었어요. 보리 한 톨 안 섞인, 순수한 쌀밥. 우리는 그 밥을 받아 들고 한참을 바라봤습니다. 너무 귀해서, 너무 고마워서 차마 먹지를 못했어요. "어서 먹어, 식기 전에." 어머니가 재촉하셨죠. 그제야 우리는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습니다.
    아, 그 맛이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어요. 보들보들하고 달콤하고 구수한 게, 이 세상 그 어떤 음식보다 맛있었습니다. 우리는 눈물을 흘리면서 먹었어요. 맛있어서 나는 눈물인지, 고마워서 나는 눈물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 그릇을 다 먹고 나니, 배도 부르고 마음도 따뜻해졌어요. '아,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배고팠지만 행복했던 이유

    여러분, 지금까지 제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돌이켜보면 참 배고팠던 시절이었어요. 쌀밥 한 그릇 제대로 먹지 못하고, 보리밥에 고추장 비벼 먹고, 고구마 줄기로 연명하던 그런 시절. 지금 생각하면 참 힘들었던 때였습니다. 어떻게 그 시절을 견뎠는지, 때로는 신기하기까지 해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시절이 자꾸 그리워집니다. 왜 그럴까요? 배는 고팠는데 마음은 따뜻했던 그 시절. 가진 건 없었지만 나눌 줄 알았던 그 시절.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보듬어주던 그 시절 말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가난했는데, 지금보다 훨씬 행복했던 것 같아요.
    어머니는 당신 밥을 덜어내셔서 우리한테 주셨고, 아버지는 당신 도시락을 나눠주시면서도 웃으셨어요. 이웃집 아주머니는 쌀 두 되를 선뜻 내어주셨고, 떡집 할머니는 쌀보다 많은 떡을 주셨습니다. 그게 바로 그 시절의 아름다움이었어요. 가난했지만 마음만은 부자였던 겁니다. 돈은 없어도 따뜻한 마음이 있었던 거죠.
    요즘은 어떻습니까? 먹을 것도 많고, 입을 것도 많고, 누릴 것도 많습니다. 냉장고에는 음식이 가득하고, 마트에 가면 온갖 식재료가 넘쳐나죠. 클릭 한 번이면 맛있는 음식이 집 앞까지 배달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때만큼 행복하지가 않아요. 밥을 먹어도 감사한 마음이 안 들고, 음식을 남겨도 아깝다는 생각이 안 듭니다. 풍요로운데 허전한 겁니다.
    그때는 달랐어요. 밥 한 숟가락, 반찬 한 점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들 알았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대하지 않았어요. 남기지도 않았고요. 쌀 한 톨도 아까워서 바닥에 떨어진 밥알을 주워 먹었습니다. 모든 게 귀했으니까, 모든 게 감사했던 겁니다. 그 마음이 그리운 거예요. 당연한 게 하나도 없던 시절, 모든 게 고마웠던 그때가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때는 가족이 함께였습니다. 밥 한 그릇을 놓고 서로 밀어주고 양보하던 그 마음. "너 먹어, 나는 배불러" 하던 그 거짓말 아닌 거짓말. 그게 바로 사랑이었어요.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밥 한 숟가락에 그 사랑이 다 담겨 있었던 겁니다. 지금처럼 "사랑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 않았지만, 행동으로 보여주셨던 거죠.
    지금 우리 부모님은 안 계십니다. 아버지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작년에 가셨어요.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가 제 손을 꼭 잡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 배고팠을 때 제대로 먹이지 못해서 미안했다. 엄마가 무능해서 너희들 고생시켰다." 저는 그 말씀을 듣고 울었어요. "엄마,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는 하나도 배고프지 않았어요. 엄마가 계셔서 너무 행복했어요. 엄마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잘 자랐잖아요."
    그게 진심이었습니다. 배는 좀 고팠을지 몰라도, 마음만은 늘 배불렀으니까요. 어머니의 사랑으로, 아버지의 헌신으로, 이웃들의 따뜻함으로 우리는 자랐습니다. 그게 바로 제 인생의 가장 큰 재산이에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재산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기억 있으시죠? 배고팠지만 행복했던 그 시절. 가난했지만 서로 사랑했던 그때. 허리띠 졸라매면서도 웃을 수 있었던 그 시절. 그 기억을 가슴에 품고 사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먹는 밥 한 그릇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어떨까요? 그게 바로 그 시절을 살아오신 우리 부모님 세대에 대한 예의이고, 감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우리도 이웃을 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우리 옆에 힘든 사람이 있을 수 있어요. 배고픈 사람, 외로운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 그분들에게 작은 관심이라도 베풀면 어떨까요? 그때 우리가 받았던 그 따뜻함을, 이제는 우리가 나눠줄 차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게 바로 그 시절의 정신을 이어가는 길이 아닐까요?
    배고팠던 그 시절이 그리운 건, 배고파서가 아닙니다. 그때는 서로를 진심으로 아꼈으니까요. 함께 웃고 함께 울었으니까요. 그 마음이 그리운 겁니다. 그 따뜻함이 그리운 거예요. 여러분도 오늘 하루, 그 마음을 기억하면서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여러분, 오늘 이야기 어떠셨나요? 배고팠던 그 시절이 새삼 그립니다. 듣다가 눈물 흘리신 분들 계실 거예요. 괜찮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진솔한 감정이니까요.
    댓글로 여러분의 어린 시절 배고팠던 기억, 또는 부모님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 이야기들이 모여서 또 다른 감동이 될 겁니다.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위로받고, 힘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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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하루, 드시는 밥 한 그릇에 감사하는 마음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세요. 그게 바로 진짜 행복이니까요.
    건강하시고, 다음 이야기에서 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