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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엄마 전화는 끊고, 며느리 전화는 달려가는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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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 멘트 (300자 내외)
"어머니, 아들은 원래 남의 편이래요.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요! 평생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키운 내 아들이, 며느리 앞에서는 과일 깎아 바치고 설거지하느라 바쁩니다. 정작 에미가 아파서 전화하면 '바빠요, 끊어요' 하던 녀석이, 며느리 전화는 신주단지 모시듯 받네요.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가슴 치며 통곡해도 소용없는 짝사랑. 며느리에게 아들 뺏긴 것 같아 밤잠 설치는 시어머니의 속사정, 오늘 제가 아주 속 시원하게 다 털어놓겠습니다. 이거 남의 얘기 아닙니다. 바로 우리 이야기입니다!"
디스크립션 (300자 내외)
남편 일찍 보내고 시장바닥에서 생선 팔아가며 악착같이 아들 하나 키워낸 순자 씨. 번듯한 대기업 보내고 장가까지 보내니 이제 발 뻗고 잘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웬걸, 장가간 아들은 '효자'는커녕 '애처가'가 되어 에미 속을 팍팍 긁어놓습니다. 며느리 눈치 보느라 에미는 뒷전이고, 며느리 힘들까 봐 앞치마 두르고 주방을 서성이는 꼴을 보자니 억장이 무너집니다. "내가 저 꼴 보려고 뼈 빠지게 고생했나..." 밀려오는 서러움과 배신감. 과연 순자 씨는 이 헛헛한 마음을 달래고 아들과 며느리를 진심으로 품을 수 있을까요?
※ 오랜만에 아들 내외가 오는 날
아이고, 어르신들. 오늘 날씨가 참 곱지요? 이런 날은 자식들 생각 더 나시잖아요.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일흔둘 되신 우리 김순자 여사님도 딱 그 마음입니다. 오늘은 한 달 만에 아들 내외가 온다는 날이라, 순자 씨는 새벽 네 시부터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부엌으로 들어가 냉장고 문을 활짝 엽니다. 아들 녀석 좋아하는 갈비찜 하려고 핏물 빼놓은 고기, 잡내 날까 봐 월계수 잎 넣고 한 번 데쳐내고, 밤이랑 대추는 일일이 까서 준비해 뒀지요. 어디 그뿐입니까? 며느리 온다고 행여 집에서 냄새날까 봐, 아픈 허리 부여잡고 걸레질을 세 번이나 했답니다. 창틀 먼지까지 이쑤시개로 파내가며 닦았으니, 집안이 반질반질 윤이 나지요.
"아이고, 내 허리야... 그래도 우리 민호 입에 들어갈 건데 대충 할 수 있나. 며느리도 온다는데 깔끔하게 해놔야 흉 안 잡히지."
순자 씨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갈비찜 간을 봅니다. 짭조름하고 달큰한 게 아주 딱입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점심때가 다 됐네요. 초인종 소리만 기다리며 현관 쪽을 힐끔거리기를 수십 번. 드디어 '딩동~' 소리가 납니다.
"어머니! 저 왔어요!"
현관문을 열자마자 곰 같은 덩치의 아들 민호가 들어옵니다. 그 뒤로 여우 같은... 아니, 아니, 고운 며느리 지은이가 따라 들어오네요.
"오냐, 오냐! 차 막히는데 오느라 고생했다. 얼른 들어와라, 배고프지?"
순자 씨는 아들 손을 덥석 잡고 거실로 이끕니다. 그런데 이 녀석, 엄마 손은 슬그머니 놓고 뒤따라오는 며느리 가방부터 받아주네요. "자기야, 무겁지? 이리 줘." 세상에, 그 가벼운 핸드백이 뭐 그리 무겁다고. 순자 씨는 못 본 척 부엌으로 가서 상을 차립니다.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진 밥상.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갈비찜에 조기 구이, 잡채까지. 순자 씨는 밥도 안 먹고 아들 숟가락 위에 갈비 한 점을 턱 올려줍니다.
"자, 많이 먹어라. 너 요즘 회사 일 힘들다며 얼굴이 반쪽이다."
"아, 엄마. 나 다이어트해요. 그리고 지은이가 생선을 좋아해."
아들은 엄마가 올려준 고기를 낼름 집어서 옆에 앉은 며느리 밥그릇에 옮겨줍니다. 그러고는 위생 장갑을 끼더니 조기 가시를 발라내기 시작합니다. 순자 씨는 숟가락을 든 채 멍하니 그 꼴을 봅니다. 옛날에 생선 가시 발라주면 "아, 귀찮게 뭘 발라줘!" 하며 짜증 내던 녀석이, 며느리 앞에서는 아주 다정함이 뚝뚝 떨어집니다.
"자기야, 아~ 해봐. 이거 알배기네. 맛있지?"
"응, 맛있어. 여보도 좀 먹어."
둘이서 아주 깨가 쏟아집니다. 순자 씨는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는지 모래알이 넘어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저 손을 어떻게 키웠는데... 겨울에 손 트지 말라고 로션 발라가며 키운 손으로, 지금 누구 시중을 드는 거야?' 속에서 천불이 확 올라옵니다.
식사가 끝나고 과일을 내옵니다. 배랑 사과를 깎아서 접시에 담아 가는데, 아들이 벌떡 일어나더니 쟁반을 뺏어 듭니다.
"엄마, 앉아 계세요. 내가 할게."
어머나, 기특해라. 순자 씨는 내심 흐뭇해서 소파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과일을 깎아서 찍은 포크가 향하는 곳이 에미 입이 아니라 또 며느리 입입니다.
"자, 사과 깎았어. 토끼 모양으로 깎으려다 실패했네. 얼른 먹어봐."
며느리는 넙죽넙죽 잘도 받아먹습니다. 순자 씨 앞에는 껍질만 수북한데, 아들은 에미가 드시는지 마시는지 신경도 안 쓰고 며느리랑 귓속말하며 킥킥대기 바쁩니다.
순자 씨는 먹던 사과 조각을 슬그머니 내려놓습니다. 입안이 써서 더는 못 먹겠습니다. 평생 내 남자, 내 아들이라고 믿고 살았는데, 이제는 완벽하게 '남의 남자'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저 낯선 사내놈이 내 뱃속으로 낳은 그놈이 맞나 싶어 눈시울이 시큰해지는데, 아들은 눈치도 없이 한술 더 뜹니다.
"엄마, 우리 이제 가봐야겠어. 지은이가 내일 친정 식구들 모임이 있어서 일찍 쉬어야 하거든. 설거지는 엄마가 천천히 하세요. 갈게!"
식탁 위에 널브러진 생선 가시와 과일 껍질을 보며, 주르륵 눈물을 쏟고 맙니다. "자식 농사 헛지었다, 헛지었어..."
※ 무거운 김치통 들고 낑낑대며 찾아갔는데
그렇게 아들을 보내고 며칠 뒤였습니다. 순자 씨는 몸살이 났는지 온몸이 으슬으슬 춥고 삭신이 쑤셨지만, 자리에 누워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고요? 시장에 갔더니 배추가 아주 실하고 좋더라고요.
'우리 며느리, 김치 사 먹는 것 같던데... 중국산 김치 그거 몸에도 안 좋은 거 먹여서 쓰나. 내가 힘들어도 담가다 주면 아들도 좋아하고 며느리도 고마워하겠지?'
순자 씨는 그 아픈 허리를 두드려가며 배추 열 포기를 절이고, 갖은양념 버무려 김치를 담갔습니다. 빨갛게 익은 김치를 통에 꾹꾹 눌러 담으니 마음이 다 뿌듯합니다. 택배로 보내려다, 김치통이 깨질까 봐, 그리고 혹시나 아들 얼굴 한 번 더 볼 수 있을까 싶어 직접 들고 가기로 합니다.
무거운 김치통을 보자기에 싸서 끌차에 싣고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탔습니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무릎이 삐걱거리고 식은땀이 줄줄 흐르지만, '엄마, 김치 너무 맛있다!' 하며 엄지척해 줄 아들 생각하며 꾹 참았습니다.
아들네 아파트 현관 앞에 도착하니 숨이 턱까지 차오릅니다. 비밀번호를 누르려다, 예의가 아닌가 싶어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누구세요?"
인터폰 너머로 들리는 아들 목소리가 왠지 당황한 기색입니다.
"나다. 에미다. 김치 좀 담가 왔다."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문이 '철컥' 열립니다. 순자 씨가 땀을 뻘뻘 흘리며 무거운 김치통을 들고 현관으로 들어서는데,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만 들고 있던 김치통을 놓칠 뻔했습니다.
거실 소파에는 며느리가 마스크팩을 붙인 채 편안하게 누워 TV를 보고 있고, 부엌에서는 아들이... 네, 그 덩치 큰 아들이 꽃무늬가 그려진 핑크색 앞치마를 두르고 고무장갑을 낀 채 설거지를 하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어... 엄마? 연락도 없이 갑자기 오시면 어떡해요!"
아들이 고무장갑 낀 손으로 물을 뚝뚝 흘리며 나오는데, 얼굴에는 반가움보다 난처함이 가득합니다. 순자 씨는 멍하니 아들의 그 우스꽝스러운 앞치마 차림을 바라봅니다. 집에서는 물 한 컵도 제 손으로 안 떠 마시던 놈이, 라면 하나 끓일 줄 모르던 놈이, 남의 집 귀한 딸 편하게 쉬게 하려고 저러고 있었던 겁니다.
"아니... 너 지금 뭐 하는 거냐? 꼴이 그게 뭐여?"
"아, 오늘 주말이잖아. 지은이 일주일 내내 회사 다니느라 힘든데, 주말엔 내가 좀 해야지. 엄마는 참... 오기 전에 전화를 하라니까."
아들의 타박에 순자 씨의 가슴이 쿵 내려앉습니다. 며느리 힘든 건 알면서, 칠순 노인네가 그 무거운 김치통 들고 온 건 안 힘들어 보이나 봅니다. 소파에 누워있던 며느리가 그제야 화들짝 놀라 마스크팩을 떼고 일어납니다.
"어머, 어머니 오셨어요? 미리 말씀을 하시지... 집 꼴이 엉망인데."
"됐다, 됐어. 내 김치만 주고 가려고 왔다."
순자 씨는 현관에 김치통을 툭 내려놓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저 김치통을 도로 가져가고 싶습니다. 내가 내 새끼 먹이려고 그 고생을 해서 담갔는데, 내 새끼는 남의 여자 시중드느라 에미가 온 줄도 모르고 타박이나 하다니.
"엄마, 들어와서 물이라도 한 잔 드시고 가세요. 무거웠을 텐데..."
아들이 뒤늦게 눈치를 보며 팔을 잡지만, 순자 씨는 그 손을 뿌리칩니다. 아들의 손에서 나는 주방 세제 냄새가 오늘따라 왜 이리 역하고 서러운지요.
"아니다. 바쁜 것 같은데 가서 일 봐라. 설거지 마저 해야지? 마누라 쉬게 해야지?"
순자 씨의 목소리에 가시가 돋칩니다. 며느리 눈치 보느라 안절부절못하는 아들의 꼴이 보기 싫어, 순자 씨는 도망치듯 현관문을 열고 나옵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아들은 "엄마, 미안해. 전화할게!"라는 말만 할 뿐, 따라 나오지도 않습니다.
아파트를 빠져나와 터덜터덜 걷는 길. 빈 수레를 끄는 손이 부들부들 떨립니다.
'내가 헛살았어... 저놈 똥기저귀 갈아주고, 입에 밥 들어가는 거만 봐도 배부르다 하며 살았는데... 이제 저놈은 내 아들이 아니구나. 그냥 지 마누라 머슴이구나.'
순자 씨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주르륵 흐릅니다. 뺏긴 것 같습니다.
※ 며느리 눈치 보느라 밥값도 아들이 아닌 에미가 내게 만드는 기막힌 상황
자, 오늘은 순자 씨의 일흔두 번째 생일입니다. 아들이 며칠 전부터 전화를 해서는 "엄마, 이번 생일엔 근사한 데 가서 외식해요. 제가 쏠게요!" 하고 큰소리를 탕탕 쳤더랬죠. 순자 씨는 그 말에 또 속도 없이 설레어서, 장롱 깊숙이 넣어뒀던 아끼는 옥색 정장을 꺼내 입었습니다. 입술에 붉은 루주도 바르고, 파마머리도 동그랗게 말아 올리고 약속 장소인 시내의 고급 갈비집으로 향합니다.
식당에 들어서니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을 하고, 아들 내외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네요.
"어머니, 생신 축하드려요! 오늘 진짜 예쁘시다."
며느리가 웃으며 반겨줍니다. 아들도 "우리 여사님 회춘하셨네!" 하며 너스레를 떱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순자 씨, 기분이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아들이 메뉴판을 펼칩니다.
"자, 오늘은 엄마 생일이니까 맛있는 거 드세요. 뭐 드실래요?"
순자 씨가 메뉴판 가격을 보니 눈이 튀어나올 것 같습니다. 소갈비 일 인분에 4만 원? 아이고, 손 떨려서 못 먹겠습니다.
"애야, 그냥 돼지갈비 먹자. 소나 돼지나 맛은 거서 거지. 아니면 그냥 갈비탕 한 그릇 먹어도 된다."
순자 씨가 짐짓 싼 걸 고르는데, 아들이 며느리를 쳐다보며 말합니다.
"자기야, 자기는 소고기 먹고 싶다며. 지난번에 여기 꽃등심 맛있다고 했잖아."
며느리가 눈치를 보며 "아니야, 어머님 드시고 싶은 거..." 하고 말끝을 흐리는데, 아들이 덥석 주문을 해버립니다.
"아유, 엄마는 맨날 돈 걱정이야. 오늘은 내가 쏜다니까? 여기요! 꽃등심 3인분 주세요! 아, 그리고 지은이가 좋아하는 육회도 하나 주시고."
순자 씨는 씁쓸하게 웃습니다. 생일은 에미 생일인데, 메뉴는 며느리 입맛대로 정해졌네요. 그래도 '내 아들이 돈 많이 벌어서 사주는갑다' 하고 좋게 생각하려 했습니다.
고기가 나오고, 아들은 역시나 고기를 굽자마자 며느리 접시에 놔주기 바쁩니다.
"자기는 미디엄으로 구워야 부드럽지? 자, 아~ 해."
순자 씨 앞접시는 텅 비었는데, 아들은 제 마누라 먹이는 데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순자 씨가 젓가락으로 타기 직전인 고기 한 점을 집어 드는데, 속에서 울컥 쓴물이 올라옵니다. 고기가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는데, 순자 씨 입에는 그저 질긴 고무 씹는 것 같습니다.
"엄마, 왜 안 드세요? 맛없어요?"
아들이 그제야 물어봅니다.
"아니다, 맛있다. 너희들 많이 먹어라. 나는 이빨이 시원찮아서 많이 못 먹는다."
결국 순자 씨는 고기 몇 점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된장찌개에 밥 한 술 말아 먹고 숟가락을 놓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계산할 때가 되었습니다. 아들이 지갑을 꺼내며 카운터로 가는데, 갑자기 뒤통수를 긁적이며 멈칫거립니다.
"어? 지갑에 카드가 없네? 아차, 자기야, 내 카드 자기가 가지고 있어?"
며느리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고개를 젓습니다.
"아니? 나한테 없는데? 차에 두고 내린 거 아니야?"
"아, 그런가? 아이참, 이거 난감하네. 차까지 갔다 오려면 주차장이 멀어서 한참 걸리는데..."
아들이 곤란하다는 듯이 순자 씨를 슬쩍 쳐다봅니다. 그 눈빛이 뭘 말하는지, 순자 씨는 단박에 알아챘습니다. 칠십 평생 눈치 밥 먹고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요.
"엄마... 혹시 엄마 카드 있으세요? 제가 차에 갔다 오기 좀 그래서... 나중에 제가 돈 부쳐드릴게요."
세상에, 생일 밥 사주겠다고 불러내 놓고는, 에미한테 밥값을 내라니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만, 순자 씨는 억장이 무너집니다.
"......그래, 내가 내마."
순자 씨는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쌈짓돈을 꺼냅니다. 15만 원이 훌쩍 넘는 돈을 세어서 내는데, 손끝이 파르르 떨립니다.
돈이 아까워서가 아닙니다. 아들놈의 그 뻔뻔함이, 에미를 물로 보는 그 태도가 너무 서러워서 떨리는 겁니다.
"고마워요, 엄마! 제가 집에 가서 바로 보내드릴게요. 헤헤."
뒤따라 나오는 순자 씨의 등 뒤로 식당 종업원들의 수군거림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아이고, 늙은 엄마가 돈 내고 자식들은 얻어먹네. 쯧쯧."
아들이 내민 커피 한 잔보다, 지금 당장 집에 가서 소주 한 잔 들이키고 싶은 심정입니다.
※ 결국 터져버린 서러움
식당을 나와 주차장으로 가는 길. 바람이 제법 찹니다. 아들과 며느리는 팔짱을 끼고 앞서 걷고, 순자 씨는 그 뒤를 터덜터덜 따라갑니다. 마치 남의집살이하는 식모가 주인집 부부 뒤를 따르는 모양새입니다.
"엄마, 우리가 집까지 모셔다드려야 하는데, 지은이가 지금 몸이 좀 안 좋아서 빨리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여기서 택시 잡아드릴게요. 택시비는 제가 넉넉히 드릴게."
아들이 택시를 잡으려고 손을 흔듭니다. 생일날, 밥값도 에미가 내게 하더니, 이제는 집에 데려다주지도 않고 택시 태워 보낸답니다. 며느리 몸 안 좋은 건 끔찍하게 챙기면서, 늙은 에미 다리 아픈 건 안중에도 없습니다.
순자 씨의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툭' 하고 끊어집니다. 그동안 꾹꾹 눌러왔던 댐이 터져버린 겁니다.
"민호야."
순자 씨가 낮게 아들의 이름을 부릅니다. 아들은 택시를 잡느라 못 들었는지 계속 도로만 봅니다.
"김민호! 이 나쁜 놈아!"
순자 씨가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며 아들의 등짝을 핸드백으로 후려칩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아들이 깜짝 놀라 뒤돌아봅니다. 며느리도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어, 엄마? 왜, 왜 그러세요?"
"네가 사람이냐? 네가 사람새끼여?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내가 너 하나 보고, 그 비린내 나는 생선 만져가며 손톱이 다 빠지도록 일해서 키웠는데...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
순자 씨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합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쳐다보지만, 창피한 줄도 모릅니다. 지금 내 속이 썩어 문드러져 죽겠는데 남의 시선이 대수겠습니까.
"엄마, 일어나세요. 사람들 보잖아요. 왜 갑자기 이러시는데요."
아들이 당황해서 순자 씨를 일으키려 하지만, 순자 씨는 아들의 손을 쳐내버립니다.
"이거 놔라! 너 이제 내 아들 아니다. 너는 그냥 지은이 남편이다! 생일? 개뿔이나 생일! 밥값도 내가 내고, 갈 때도 택시 타고 가라? 너는 에미가 지갑으로 보이냐? 아니면 귀찮은 짐짝으로 보이냐?"
그동안 쌓였던 말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옵니다.
"너 장가 가던 날, 내가 며칠 밤을 울었는지 아냐? 좋아서 운 게 아니다. 이제 내 품 떠나서 남의 남자 된다는 게 서러워서 울었다. 그래도 며느리한테 잘해주면 너한테 잘할까 싶어, 김치 담가 나르고 눈치 봐가며 살살 기었는데... 돌아오는 게 고작 이거냐?"
순자 씨가 가슴을 펑펑 치며 통곡합니다.
"나는 며느리 눈치 보느라 숨도 크게 못 쉬는데, 너는 며느리 발 씻겨줄 기세더라? 그래, 마누라 아끼는 거 좋다. 근데 이놈아, 너 낳고 키운 에미한테도 반만큼은 해야 할 거 아니냐! 내가 과일을 깎아달랬냐, 업어달랬냐? 그냥 따뜻한 눈길 한번, 말 한마디면 되는데, 그게 그리 힘들더냐!"
며느리 지은이는 어쩔 줄 몰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 서 있고, 아들 민호는 멍하니 서서 입만 뻥긋거립니다. 한 번도 엄마가 이렇게 화내는 걸 본 적이 없거든요. 늘 "오냐, 오냐, 내 새끼" 하며 받아주던 엄마였는데, 저렇게 짐승처럼 울부짖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겁니다.
"다 필요 없다. 돈도 필요 없고, 가짜 효도도 필요 없다. 너희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아라. 나는 이제 죽으나 사나 혼자 살란다. 다시는 나 찾지 마라!"
순자 씨는 벌떡 일어나 마침 앞에 선 택시 문을 열고 맙니다. 아들이 "엄마! 엄마!" 하고 부르며 따라오지만, 순자 씨는 택시 기사에게 "빨리 가주세요! 빨리요!" 하고 소리칩니다.
택시가 출발하고, 뒤따라오던 아들의 모습이 백미러 속에서 점점 작아집니다. 오늘 생일은 순자 씨 인생에서 가장 비참하고, 가장 서러운 날로 기억될 겁니다.
※ 아들의 편지
그날 이후로 순자 씨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두문불출했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밖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데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엄마! 문 좀 열어주세요! 저 민호예요! 엄마!"
아들 목소리입니다. 순자 씨는 이불속에서 꿈쩍도 안 합니다. '흥,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냐. 나는 자식 없는 셈 치고 살 거다.' 하고 마음을 독하게 먹었거든요. 그런데 이 녀석이 한 시간이 넘도록 안 가고 문 앞에서 "엄마, 잘못했어요" 하며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겁니다.
순자 씨, 결국 마음이 약해져서 슬그머니 문을 열어줍니다. 문을 열자마자 비에 쫄딱 젖은 생쥐 꼴을 한 아들이 현관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습니다.
"엄마..."
"왜 왔냐. 가서 네 색시 발이나 씻겨주지, 늙은 에미 뭐 볼 게 있다고 왔냐."
순자 씨가 쌀쌀맞게 쏘아붙이는데, 아들이 품에서 꼬깃꼬깃한 편지 한 장을 꺼냅니다.
"엄마, 이거... 제가 말로는 다 못 할 것 같아서 써 왔어요. 제발 한 번만 읽어주세요."
순자 씨는 뺏듯이 편지를 채갑니다. 방에 들어와 돋보기를 쓰고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데, 글씨가 삐뚤빼뚤한 게 쓰는 내내 손을 떤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엄마. 불효자 민호입니다. 엄마, 제가 죽일 놈입니다. 엄마가 저를 어떻게 키우셨는데... 시장통에서 생선 비린내 맡아가며 저 대학 보내고 장가보낸 거, 제가 어찌 모르겠어요. 그런데 엄마, 저도 사는 게 참 힘들었어요.
장가가면 효도할 줄 알았는데, 중간에서 아내 눈치 보랴, 회사 일 하랴,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요즘 세상에 남자들이 집안일 안 하면 이혼당한다고 해서, 살아보려고 아둥바둥하다 보니... 정작 제일 편하고 만만한 엄마한테 소홀했어요. 엄마는 내 엄마니까,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다 이해해 줄 거라고 착각했어요. 엄마가 지갑이 없어서가 아니라, 엄마 마음이 가난해져서 우셨다는 걸 미처 몰랐어요. 엄마, 정말 죄송해요.'
편지 곳곳에 눈물 자국이 번져 있습니다. "엄마는 내 엄마니까 다 이해해 줄 줄 알았다..." 이 한마디가 순자 씨의 가슴을 후벼 팝니다. 그래요, 자식한테 부모는 언제나 퍼주는 나무인 줄만 알았던 거지요. 그 나무도 늙고 병들고 외로움을 탄다는 걸, 이 미련한 곰탱이가 이제야 깨달은 겁니다.
거실로 나가보니 아들은 여전히 현관에 무릎 꿇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습니다. 어깨가 들썩거리는 게 울고 있는 모양입니다.
"일어나라, 이놈아. 바닥 차다."
순자 씨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습니다. 아들이 고개를 들고 순자 씨를 쳐다봅니다. 눈이 퉁퉁 부어 있습니다.
"엄마, 다시는 안 그럴게요. 지은이 눈치 안 보고 엄마 먼저 챙길게요. 밥값 내라고 해서 미안해요. 택시 태워 보낸 거 미안해요. 내가 다 잘못했어."
아들이 순자 씨의 허리를 끌어안고 엉엉 웁니다. 덩치는 산만 한 녀석이 아이처럼 우는 꼴을 보니, 순자 씨 눈에서도 눈물이 핑 돕니다.
"오냐, 알았다. 네가 내 속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 내가 홧병이 날 뻔했다. 자식이 뭐라고... 에미는 너 하나 잘 사는 거면 되는데, 그래도 섭섭한 건 어쩔 수가 없더라."
순자 씨가 아들의 젖은 등을 토닥여줍니다. 밉다 밉다 해도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인데 어쩌겠습니까.
※ 며느리의 다가옴
아들이 다녀가고 며칠 뒤, 주말 오후였습니다. '띵동-' 초인종이 울립니다. 이번엔 누굴까요? 인터폰을 보니 며느리 지은이 혼자 서 있습니다. 양손에 바리바리 쇼핑백을 들고 말이지요.
"어머니, 저예요. 지은이요. 문 좀 열어주세요."
순자 씨는 잠시 망설이다가 문을 열어줍니다. 며느리가 쭈뼛쭈뼛 들어오는데, 평소처럼 화려한 옷차림이 아니라 수수한 옷에 화장기 없는 얼굴입니다.
"어머니... 식사는 하셨어요?"
"그래, 먹었다. 네 남편이 시키드냐? 뭐 하러 왔냐?"
순자 씨가 짐짓 퉁명스럽게 묻습니다. 며느리가 식탁 위에 쇼핑백들을 내려놓으며 조심스레 입을 엽니다.
"아니요, 그이가 시킨 거 아니에요. 제가 오고 싶어서 왔어요. 어머니... 이거 어머니 좋아하시는 쑥떡이랑, 제가 백화점 가서 산 립스틱이에요. 지난번 생신 때 너무 죄송해서..."
며느리가 내민 쇼핑백에는 순자 씨가 평소 비싸서 못 사 먹던 유명한 떡집의 쑥떡과, 고운 색깔의 립스틱이 들어있습니다. 아들 놈은 엄마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는데, 며느리는 용케도 떡 좋아하는 걸 기억하고 있었네요.
"어머니, 저 솔직히 어머니가 그렇게 서운해하실 줄 몰랐어요. 민호 씨가 워낙 자상해서 저한테 잘해주는 건데, 어머니 보시기엔 아들 뺏긴 것 같으셨죠?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같은 여자로서 어머니 외로움을 먼저 헤아렸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며느리가 순자 씨의 손을 슬그머니 잡습니다. 며느리의 손이 따뜻합니다. '같은 여자로서...' 그 말이 순자 씨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킵니다. 맞습니다. 며느리도 누군가의 귀한 딸이고, 나중에 자식을 낳으면 시어머니가 될 여자지요.
"지은아, 나도 미안하다. 네가 미워서 그런 게 아니다. 그냥... 내가 늙어서 주책이지. 아들놈 하나 믿고 살다가, 네가 나타나니까 내 자리가 없어진 것 같아서... 질투가 나더라. 늙은 시어미가 며느리 질투나 하고, 참 못났지?"
순자 씨가 씁쓸하게 웃자, 며느리가 고개를 세차게 젓습니다.
"아니에요, 어머니. 저라도 그랬을 거예요. 민호 씨가 중간에서 처신을 잘 못 한 것도 있고요. 어머니, 앞으로는 제가 민호 씨보다 더 잘할게요. 아들은 원래 무뚝뚝하잖아요. 딸 하나 생겼다 생각하고 저 예뻐해 주세요."
며느리가 살갑게 팔짱을 끼어옵니다. 곰 같은 아들 녀석보다 훨씬 부드럽고 싹싹합니다. 이래서 다들 딸이 있어야 한다고 했나 봅니다.
"그리고 어머니, 저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
"부탁? 뭐, 돈 빌려달라는 거냐?"
"아뇨~ 그게 아니고요. 저번에 어머니가 담가 주신 김치요. 그거 너무 맛있어서 다 먹었거든요. 저 담그는 법 좀 가르쳐주세요. 제가 재료 다 사 올 테니까 옆에서 배우고 싶어요. 네?"
어머나, 김치 담그는 법을 가르쳐달라니요. 요즘 젊은 애들은 김장이라면 질색을 한다던데. 순자 씨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집니다.
"아이고, 그 힘든 걸 뭐 하러 배우려고 그러냐. 그냥 내가 담가 주마."
"아니에요! 어머니 손맛 배우고 싶어요. 이번 주말에 같이 담가요. 끝나고 제가 수육도 삶아드릴게요!"
며느리의 애교에 순자 씨는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입니다. 며느리가 여우는 여우인가 봅니다.
※ 아들은 아들 인생, 나는 내 인생
자,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났습니다. 순자 씨네 집 분위기가 확 바뀌었습니다. 지금 순자 씨는 거울 앞에서 꽃단장하느라 바쁩니다.
"야, 야, 야~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트로트 노래를 흥얼거리며 며느리가 사준 립스틱을 바릅니다. 오늘 복지관 노래 교실 가는 날이거든요. 빨간 원피스에 스카프까지 두르니 십 년은 젊어 보입니다. 그때 전화벨이 울립니다. 아들 민호입니다.
"어, 민호냐? 왜 전화했냐?"
"엄마! 오늘 주말인데 뭐 하세요? 제가 갈비찜 맛있는 데 알아놨는데 지은이랑 같이 가서 점심 먹을까요?"
예전 같으면 "아이고 좋다! 당장 온나!" 했을 텐데, 순자 씨 반응이 시큰둥합니다.
"아이고, 야야. 됐다. 나 오늘 바쁘다."
"네? 엄마가요? 어디 가시는데요?"
"나 오늘 노래 교실 친구들이랑 단풍놀이 가기로 했다. 관광버스 대절해서 간다. 거기 가서 노래도 부르고 도시락도 까먹고 할거다. 너희들끼리 맛난 거 사 먹어라."
"어... 그래요? 엄마, 저 보고 싶어서 우실 땐 언제고, 이제 아들은 뒷전이시네요?"
아들이 섭섭한 듯 투덜거립니다. 순자 씨는 통쾌해서 웃음이 나옵니다.
"이놈아, 있을 때 잘하지 그랬냐. 나도 이제 내 인생 살란다. 너만 바라보고 살기엔 내 남은 청춘이 너무 아깝다! 아, 참. 이번 주엔 오지 마라. 나 피곤해서 좀 쉬어야겠다."
순자 씨는 쿨하게 전화를 끊어버립니다. 아들 녀석, 아마 전화기 붙들고 멍하니 있겠지요? 쌤통입니다.
순자 씨는 핸드백을 메고 현관을 나섭니다. 가을 햇살이 눈부십니다. 예전에는 이 햇살을 보면 '아들 이불 빨래나 해줄까' 생각했는데, 지금은 '어디 놀러 가면 좋을까' 생각합니다.
엘리베이터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주름은 좀 늘었어도, 표정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환합니다.
'그래, 김순자. 잘했다. 자식은 자식 인생, 나는 내 인생인 거여. 품 안의 자식이지, 다 크면 남이다 생각하고 놓아줘야 서로 편한 거여.'
순자 씨는 깨달았습니다. 며느리한테 아들을 뺏긴 게 아니라, 아들을 독립시켜준 거라는 걸요. 그리고 그 빈자리는 외로움이 아니라, 온전히 '나'를 위한 자유로 채워야 한다는 걸요.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순자 씨의 발걸음이 깃털처럼 가볍습니다. 아들 밥 차려줄 걱정, 며느리 눈치 볼 걱정 없이, 오늘은 목청껏 노래 부르고 친구들이랑 막걸리나 한 잔 걸치고 올 생각입니다.
지나가던 동네 할머니가 묻습니다.
"어이구, 순자 씨! 오늘 얼굴이 훤하네? 좋은 일 있어?"
순자 씨가 활짝 웃으며 대답합니다.
"그럼요! 제가 아들 짝사랑 끝내고, 제 자신이랑 연애 시작했거든요!"
여러분, 우리 순자 씨 참 멋지지 않습니까? 자식 바라기 멈추고 나를 찾은 순자 씨의 인생 2막,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입니다!
유튜브 엔딩 멘트
"어머님들, 오늘 순자 씨 이야기 들으면서 속이 좀 뚫리셨습니까? 아들 키워봐야 다 소용없다는 말, 너무 서럽게 듣지 마세요. 그건 자식이 부모를 버린 게 아니라, 제 짝 찾아서 제 둥지를 튼 것뿐입니다. 새가 다 컸으면 날려 보내야지, 붙잡고 있으면 둘 다 병납니다.
이제는 아들 밥 걱정 그만하시고, 어머님 드시고 싶은 거 사 드세요. 며느리 눈치 보지 마시고, 친구 만나서 수다 떨고 노래 부르세요. 내가 행복해야 자식들도 편안해합니다. 아들은 며느리한테 맡겨두고, 우리는 우리 인생 멋지게 즐겨봅시다! 오늘 이야기가 위로가 되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꾹 눌러주시고, 저는 다음에 더 신나고 기운 나는 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 모두들 강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