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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적의 딸에서 조선 최고의 상단 객주가 된 여인 『청구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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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한순간에 멸문지화를 당하고 노비로 전락한 양반집 규수. 험준한 산속에서 우연히 알게 된 붉은 인삼의 비밀이 그녀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꿉니다. 조선 최고의 갑부가 되어 원수들의 숨통을 끊어놓는 통쾌한 복수극이 지금 시작됩니다.
※ 1: 몰락과 노비 생활, 그리고 목숨을 건 도망
살을 에이는 듯한 섣달그믐의 매서운 삭풍이 온 천지를 꽁꽁 얼어붙게 만들던 참혹한 밤이었다. 한양 도성 한복판, 하늘을 찌를 듯한 드높은 기개와 꼿꼿한 선비 정신을 자랑하던 대제학 서 대감의 웅장한 저택은 일순간에 시뻘건 화마에 휩싸여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해버렸다. 평생을 대쪽 같은 성정으로 오직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펴고자 진력했던 서 대감은 하루아침에 흉악한 역모를 꾀했다는 무시무시한 누명을 쓴 채, 꽁꽁 언 마당 한가운데에 포승줄로 결박당하여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입술은 분노로 파르르 떨리고 있었고, 서릿발 같은 눈빛은 눈앞에 선 교활한 정적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서 대감! 어찌하여 감히 천인공노할 역적 모의를 하셨단 말이오! 평생을 성군으로 모시던 전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이리도 원수로 갚는단 말이오! 하늘이 두렵지 않소이까!"
겉으로는 나라를 걱정하는 충신인 양 호통을 치고 있었지만, 그 교활한 입가에 맺힌 비릿한 미소를 숨기지 못하는 자는 평소 서 대감과 앙숙지간이던 권신 조 대감이었다. 조 대감의 손에는 서 대감의 필체를 교묘하게 위조하여 꾸며낸 거짓 역모 가담 편지가 마치 철통같은 증거인 양 펄럭이고 있었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일이다! 나는 결단코 단 한 번도 역심을 품은 적이 없다! 네놈이 권력을 탐하여, 바른말을 하는 이 늙은이의 입을 막고자 천벌을 받을 몹쓸 짓을 꾸미는구나! 내 죽어서 악귀가 되어서라도 네놈의 그 추악한 가면을 벗겨버릴 것이다!"
"여봐라! 저 역적놈의 입을 당장 틀어막아라! 그리고 이 집안의 가솔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조리 하옥하여 국문장에 대령하도록 하라!"
조 대감의 서늘한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번뜩이는 칼을 찬 관군들이 승냥이 떼처럼 들이닥쳐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베고 짓밟으며 포승줄로 묶어대기 시작했다. 서 대감의 금지옥엽 외동딸이자 한양 제일의 재원으로 소문났던 서희는 치맛자락이 찢기고 고운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채 끌려가는 아버지를 보며 땅을 치며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아버님! 아버님! 안 됩니다! 이보시오, 우리 아버님은 죄가 없소! 제발 우리 아버님을 놓아주시오! 아버님!"
거친 관군들의 손아귀에 붙들려 형장으로 질홍 끌려가던 서 대감은 피눈물을 흘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억장이 무너지는 고통 속에서도 딸을 향한 마지막 유언을 남기기 위해 그는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 내어 소리쳤다.
"서희야! 내 귀한 딸 서희야! 울지 마라. 이 애비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결백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는 법이니,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끔찍한 치욕을 겪더라도 기필코 살아남아야 한다! 목숨을 부지하여 살아남아 이 애비의 원통함을, 우리 가문의 억울한 결백을 네 손으로 밝혀다오! 알겠느냐! 부디 살아남거라!"
그 처절한 외침이 서희가 들은 아버지의 마지막 음성이었다. 서 대감은 모진 고문을 견디다 못해 결국 형장의 이슬로 참혹하게 사라졌고, 명문대가였던 가문은 하루아침에 멸문지화를 당해 역사 속으로 지워지고 말았다. 양반가의 고귀한 규수로서 비단옷에 꽃신만 신던 서희는, 천민 중에서도 가장 천대받는 관노비로 전락하여 낯선 평안도의 깊고 험한 산골짜기 토호 집안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살아남아야 한다. 내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기는 한이 있어도 살아남아야 한다. 아버님의 원통한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면, 이 짐승만도 못한 치욕을 견디고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아서, 그 놈의 심장에 기어이 칼을 꽂으리라.'
토호 집안에서의 노비 생활은 그야말로 매일매일이 끔찍한 지옥의 연속이었다. 새벽닭이 울기도 전인 꼭두새벽부터 밤이 깊어 부엉이가 울 때까지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고된 노동이 그녀를 옥좼다. 산더미 같은 장작을 패고, 수십 명의 밥을 지었으며, 조금만 행동이 굼뜨거나 실수를 해도 무자비한 채찍과 몽둥이찜질이 날아왔다. 한겨울 살얼음이 언 꽁꽁 언 냇물에 맨발로 들어가 맨손으로 산더미 같은 빨래를 하다 보면, 곱던 손등이 쩍쩍 갈라져 붉은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상한 냄새가 진동하는 쉰 보리밥 한 덩이로 주린 배를 채우면서도, 서희의 두 눈빛만은 어둠 속의 맹수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밤이 되어 외풍이 들이치는 허름한 헛간 볏짚 더미에 쓰러지듯 누우면,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고 조 대감의 그 비열한 얼굴을 수백 번 수천 번 떠올렸다.
'기다려라, 조 대감. 내 반드시 살아서 한양으로 돌아갈 것이니. 내 아버지를 죽인 그 시퍼런 칼로, 네놈들의 목을 치고 네놈들이 가진 모든 것을 깡그리 빼앗아 주마. 내 가문이 흘린 억울한 피눈물을 천 배, 만 배의 고통으로 되돌려 갚아줄 것이다.'
지옥 같은 인고의 세월을 버티던 어느 섣달그믐날 밤, 마침내 하늘이 내린 기회가 찾아왔다. 악독한 주인의 회갑 잔치로 온 집안사람들이 고기와 술에 거나하게 취해 깊은 잠에 곯아떨어진 것이다. 집안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은 틈을 타, 서희는 평소 품속 깊이 숨겨두었던 녹슨 낫을 꺼내 들고 헛간의 낡은 문고리를 소리 없이 부수고 뛰쳐나왔다. 어디로 가야 살 수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북극성 하나만을 이정표 삼아 짐승들이 울부짖는 깊고 험한 겨울 산속으로 미친 듯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저기다! 저기 도망친 노비 년이 있다! 어서 잡아라! 잡아서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놔라!"
뒤늦게 관노비가 도망친 것을 알아챈 토호의 추쇄꾼들이 사나운 사냥개들을 풀고 횃불을 치켜든 채 산기슭을 붉게 물들이며 무서운 속도로 쫓아오고 있었다. 살기 어린 개 짖는 소리와 사내들의 분노에 찬 고함이 귓가를 찢을 듯이 때렸다. 서희는 뾰족한 가시덤불에 치마가 갈기갈기 찢기고, 맨발이 날카로운 돌부리에 찢겨 피가 철철 흐르는 줄도 모른 채 필사적으로 가파른 산을 기어올랐다. 나무뿌리에 채여 넘어지고 비탈길에서 구르면서도 오직 살아서 복수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이빨을 부서져라 꽉 깨물고 다시 일어섰다.
"안 돼... 여기까지인가… 안 됩니다, 아버님… 저는 아직 시작도 못 했는데... 여기서 이대로 죽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흘 밤낮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굶주리며 험준한 산을 헤맨 그녀의 가녀린 체력은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거센 눈보라까지 매섭게 몰아치기 시작하자,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과 추위가 그녀를 집어삼켰다. 뼈마디를 날카로운 칼로 깎아내는 듯한 혹한의 추위와 극도의 허기에 지친 서희는, 결국 거대한 고목 나무 아래의 깊은 눈구덩이 속에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서서히 흐려져 가는 아득한 의식 속에서, 자신의 얼굴 위로 차갑게 내려앉는 하얀 눈송이를 바라보며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 2: 첩첩산중 심마니 부자와의 만남, 숙삼의 전설을 듣다
"아버지! 여기 좀 와보십시오! 여기 눈더미 속에 사람이 쓰러져 있어요! 얼음장같이 차갑지만 아직 가슴에 미세하게 숨이 붙어 있습니다!"
누군가의 다급하고 굵직한 사내의 목소리가 서희의 아득하고 몽롱한 귓가를 맴돌았다. 무거운 납덩이를 얹은 듯한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애썼지만, 몸은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의 억센 두 팔이 꽁꽁 얼어붙어 굳어버린 그녀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려, 한없이 넓고 따뜻한 등짝에 단단히 업는 것만이 희미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쯧쯧쯧, 불쌍하기도 하지. 어쩌다 이 험하고 깊은 겨울 산중까지 홀로 들어와 이 지경이 되었누. 서둘러라, 윤아! 발걸음을 재촉해라! 자칫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이 가여운 목숨이 그대로 얼어 죽고 말겠구나."
얼마의 긴 시간이 흘렀을까. 죽음의 문턱에서 헤매던 서희가 힘겹게 천천히 눈을 떴을 때, 얼어붙은 그녀의 감각을 가장 먼저 깨운 것은 코끝을 부드럽게 맴도는 짙고 향긋한 산흙 내음과 가슴속까지 따뜻하게 데워주는 쌉싸름한 약초 달이는 향기였다. 비록 사방이 흙벽으로 둘러싸인 낡고 허름한 산막이었지만, 방 안에는 훈훈한 온기가 가득했고 방 한가운데 놓인 화로에서는 붉은 장작이 타닥타닥 정겨운 소리를 내며 타오르고 있었다. 서희가 몸을 일으키려다 극심한 근육의 통증에 작게 신음 소리를 내자, 화로 곁에 쪼그려 앉아 정성스레 약탕기를 젓고 있던 건장한 체격의 젊은 사내가 부지깽이를 내팽개치고 황급히 다가왔다.
"아, 드디어 깨어나셨습니까! 아직 기력이 온전치 못하니 무리해서 움직이지 마십시오. 꼬박 사흘 밤낮을 사경을 헤매시며 앓으셨습니다. 정말이지 숨이 끊어지는 줄 알고 얼마나 조바심을 쳤는지 모릅니다."
"이… 이곳은 대체 어디입니까? 당신들은 뉘신데 죽어가던 저를…."
그때, 등채에 산더미 같은 약초 더미를 짊어진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들어오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허허허, 천만다행이로다! 염라대왕 노름꾼이 아직 이 어여쁜 처자를 저승으로 데려갈 때가 아니라고 물리친 모양이구먼. 우리는 이 험한 첩첩산중을 떠돌며 산삼을 캐고 희귀한 약초를 구하여 연명하는 보잘것없는 심마니 부자라네. 내 아들 녀석 윤이가 눈밭에 파묻혀 숨이 멎어가던 처자를 발견하여 냅다 업고 뛰었다네. 자, 어서 이 뜨끈한 약물부터 한 모금 마셔보시게나."
서희는 자신을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준 선량한 심마니 부자를 번갈아 보며 참았던 뜨거운 눈물을 하염없이 쏟아냈다. 노비로 쫓기며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던 자신을 대가 없이 거두어준 생명의 은인이었다.
"감사합니다… 정말이지 너무도 감사합니다. 제 목숨을 살려주신 이 하해와 같은 은혜를 살아서 어찌 다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은혜라니, 가당치도 않은 소리.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 목숨을 살리는 것은 천하의 당연한 이치이자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소. 헌데, 그 곱고 흰 손이며 말씨를 가만 보아하니 험한 밭일 한 번 안 해본 양반댁 귀한 여식 같은데, 어찌하여 그런 다 해진 누더기를 걸치고 이 깊고 무서운 겨울 산을 홀로 헤매고 있었던 게요? 무슨 말 못 할 사연이라도 있는 게요?"
서희는 순간 숨이 턱 막히며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억울하게 역적으로 몰려 멸문지화를 당한 사대부 집안의 여식이자, 추쇄꾼들에게 쫓기는 도망친 관노비라는 끔찍한 사실을 밝히면, 이 선량하고 무고한 부자에게 씻을 수 없는 큰 화를 미칠 것이 자명했다.
'아니다. 이분들에게 나의 불행을 전가하여 짐이 될 수는 없다. 내 과거의 신분과 원한은 복수를 이루는 그날까지 뼛속 깊이 무덤까지 숨겨가야만 한다.'
"저는… 그저 전염병으로 가족을 모두 한꺼번에 잃고, 모진 빚쟁이들에게 쫓겨 밤낮없이 도망치던 중이었습니다. 의지할 친척 하나 없이 갈 곳이 없어 산을 넘다 보니 이 깊은 산속까지 기어들어 오게 되었습니다. 제발 저를 내치지 말아 주십시오."
서희의 애처로운 거짓말에 노인은 깊은 연민의 눈빛을 보내며 더 이상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쯧쯧쯧, 참으로 험하고 모진 세상을 만나 어린 나이에 고초가 컸겠구먼. 갈 곳이 정 없다면 몸의 기력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눈치 보지 말고 이곳에 머물며 지내시게나. 비록 짐승 고기에 거친 밥상뿐이지만 우리 부자가 처자 하나 굶기야 하겠소."
그날부터 서희는 심마니 부자의 산막에 머물며 더부살이를 시작했다. 그녀는 양반가에서 배운 특유의 총명함과 예리한 눈썰미로 부자가 험한 산을 타며 캐오는 수백 가지의 각종 약초를 정확히 분류하고 다듬는 일을 도맡아 했다. 서희의 야무지고 체계적인 솜씨 덕분에 늘 뒤죽박죽 엉망이었던 산막의 약초 창고는 금세 종류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약방을 방불케 했다. 노인과 윤이는 서희의 박학다식함과 지혜로움에 매일같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겨울이 가고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비 오는 밤, 처마 밑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캔 인삼의 흙을 털어내던 노인이 깊고 무거운 한숨을 땅이 꺼져라 내쉬며 중얼거렸다.
"아깝구나, 정말 아까워. 피땀 흘려 캔 이 귀한 인삼들이 습기를 잔뜩 먹어 속부터 썩어 문드러지고 있으니. 산삼 못지않게 사람 살리는 약효가 훌륭한 것들인데,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하고 썩어버리니 보관할 방도가 없어 늘 상인들에게 헐값에 넘기거나 썩혀서 거름으로 버려야 하는 것이 우리 심마니들의 천추의 한이로다."
그 한탄을 조용히 듣고 있던 서희가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진지하게 물었다.
"어르신, 이 귀한 인삼의 약효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썩지 않고 오래 보관할 방도가 세상에 아예 없는 것입니까?"
"있지, 암, 있고말고. 아주 까마득한 옛날부터 우리 심마니들 사이에서 입에서 입으로만 은밀하게 전해 내려오는 전설 같은 비방이 하나 있지. '숙삼'이라고 하여, 밭에서 캔 생인삼을 아주 특수한 방법으로 찌고 말리기를 끈질기게 거듭하면 뽀얀 인삼의 색이 핏빛처럼 붉게 변하고 돌처럼 단단해진다고 하더군. 그리 완벽하게만 만들면 십 년을 창고에 두어도 절대 썩지 않고, 그 약효는 백 배나 더 훌륭해져 죽어가는 사람도 벌떡 일으켜 세운다고 하더구나."
그 순간, 서희의 처연했던 두 눈이 번쩍 뜨이며 강렬한 빛을 발했다.
"찌고 말린다 굽쇼? 그토록 훌륭한 방도가 있는데 어찌하여 심마니들은 그 좋은 방법을 쓰지 않고 썩혀 버리시는 겝니까?"
"허허, 말이 쉽지 그게 보통 까다롭고 요망한 일이 아니야. 물이 끓는 온도, 솥에서 찌는 시간, 볕에 말리는 바람의 결, 이 모든 것이 터럭만큼이라도 어긋나면 인삼이 시커멓게 숯덩이처럼 타버리거나, 속이 텅 비어 잿더미가 되어 훅 불면 날아가 버리거든. 수백 년간 수많은 심마니가 벼락부자가 되기 위해 평생을 바쳐 시도했지만, 그 정확한 이치와 때를 깨달은 자가 단 한 명도 없어 이젠 다들 포기하고 말았다네. 아마도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그저 헛된 전설일지도 모르지."
'찌고 말리기를 거듭하여 독성을 빼고 약효를 극대화한다… 찌고 말리기를 거듭한다…'
서희의 머릿속에 벼락이라도 친 듯 무언가가 번쩍하고 스쳐 지나갔다. 어릴 적, 천재적인 두뇌로 아버님의 서재에 쌓인 수많은 고서를 탐독했던 기억. 그중에서도 중국의 가장 오래된 의학서적인 『신농본초경』과 각종 약재 서적에서 읽었던 한 구절이 뇌리를 강타했다. 약재를 가공할 때 천지의 음과 양의 조화를 완벽하게 맞추기 위해 찌고 볕에 말리는 과정을 무려 아홉 번이나 반복한다는 '구증구포(九蒸九曝)'의 원리!
'어쩌면… 그 옛날 의학 책에서 읽었던 구증구포의 신묘한 원리를 이 조선의 인삼에 적용한다면? 단순히 불을 때어 찌는 것이 아니라, 오행의 이치에 따라 솥의 온도를 섬세하게 조절하고 수분을 완벽하게 다스린다면?'
가슴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바로 이것이었다. 자신을 이 비참한 노비의 밑바닥에서 구원하고, 무너진 가문을 다시 으리으리하게 세우며, 원수 조 대감 일파에게 처절하게 복수할 수 있는 막대한 재력을 거머쥘 수 있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열쇠.
"어르신, 그리고 윤이 도령.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 전설 속의 '숙삼'이라는 것, 제가 기필코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 3: 붉은 인삼과 홍삼 젤리의 탄생, 그리고 싹트는 사랑
그날 이후, 서희는 마치 무언가에 단단히 홀린 사람처럼 본격적인 숙삼 제조에 미친 듯이 매달렸다. 그녀는 이른 새벽부터 윤이와 함께 험한 산비탈을 샅샅이 뒤져 가장 뿌리가 실하고 뇌두가 튼튼한 최고급 질 좋은 인삼만을 조심스레 캐어 왔다. 맑은 계곡물에 인삼의 흙을 상처 하나 없이 깨끗이 씻어낸 뒤, 마당 한가운데 커다란 가마솥을 걸고 장작에 불을 지폈다. 서희의 머릿속에는 오직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완벽한 온도와 찌는 시간을 기어이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집념만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윤이 도령, 처음에는 장작을 많이 넣어 아주 센 불로 물을 끓여 시루를 찌되, 수증기가 인삼에 직접 닿아 짓무르지 않도록 시루 바닥에 마른 짚을 아주 넉넉히 깔아야 합니다. 그리고 솥뚜껑 위로 하얀 김이 피어오르기 시작하면, 즉시 장작을 빼내어 불을 아주 약하게 줄여 은은한 불길로 오랫동안 쪄내야만 인삼의 진액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고스란히 응축될 것입니다."
윤이는 얼굴이 시뻘겋게 익도록 굵은 땀을 뻘뻘 흘리며 쉴 새 없이 장작을 패고 가마솥의 맹렬한 불씨를 섬세하게 조절했다. 서희는 매운 연기에 눈물을 쏟으면서도 가마솥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은 채, 얇은 대나무 꼬챙이로 시루 속의 인삼을 찔러보며 익어가는 정도와 수분의 양을 예리하게 살폈다.
그러나 전설은 괜히 전설이 아니었다. 처음 몇 달간의 시도는 참혹한 실패의 연속이었다. 불조절을 조금만 강하게 하여 너무 오래 찌면 인삼이 죽처럼 허물어져 내렸고, 반대로 불이 약하면 속이 설익어 버렸다. 또한 쪄낸 인삼을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 습한 곳에 말리다 보니 하루 만에 푸른 곰팡이가 슬어 전부 내다 버려야 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서희는 단 한 번도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실패하여 숯덩이가 된 인삼을 만지며 그 원인을 분석했고, 실패할 때마다 불의 온도를 미세하게 낮추거나, 볕에 말리는 시간을 계절에 따라 늘렸다 줄이며 그 모든 과정을 나뭇조각에 빼곡하게 기록하고 또 기록했다.
"서희 낭자, 너무 무리하시는 것 아닙니까? 벌써 며칠 밤낮을 꼬박 새우시며 가마솥 앞을 지키셨습니다. 피골이 상접하셨습니다. 그러다 쓰러지기라도 하시면 약초고 복수고 다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제발 좀 눈 좀 붙이십시오."
윤이가 안타까운 얼굴로 차가운 수건을 적셔와 서희의 이마에 맺힌 땀과 그을음을 조심스레 닦아주며 걱정스럽게 애원했다. 서희는 새까매진 얼굴로 옅고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윤이의 듬직한 눈을 바라보았다.
"괜찮습니다, 도령. 저는 조금도 힘들지 않습니다. 도령께서 낮에는 생업을 잇느라 험한 산을 타시고 밤에는 이리 제 곁에서 불을 때주시며 헌신적으로 도와주시는데, 제가 어찌 나약하게 지쳐 쓰러질 수 있겠습니까.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지난번들과 확실히 느낌이 다릅니다. 속까지 단단하게 익어가는 향이 납니다."
수백 번의 뼈아픈 실패와 좌절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아홉 번을 찌고 아홉 번을 햇볕과 바람에 말리는 '구증구포'의 험난한 과정을 모두 마친 날 아침이 밝았다. 서희가 떨리는 양손으로 마지막 시루 뚜껑을 조심스레 여는 순간, 비좁은 산막 안팎은 이제껏 단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깊고 진하면서도 사람의 애간장을 녹일 듯 묘하게 달콤한 한약재의 향기로 가득 채워졌다. 시루 안의 뽀얗고 퉁퉁했던 생인삼은 어느새 눈부시게 붉은빛을 띠는, 맑고 투명하며 겉이 반질반질한 자줏빛 덩어리로 경이롭게 변해 있었다. 아침 햇살을 받아 최고급 루비 보석처럼 영롱하게 반짝이며 빛나는 그것은, 더 이상 흔해 빠진 평범한 밭 인삼이 아니었다.
"아, 아버지! 서희 낭자! 이것 좀 보십시오! 세상에… 인삼이… 인삼이 정말로 붉게 변했습니다! 돌덩이처럼 단단하면서도 손으로 부러뜨려 보니 속은 진액으로 꽉 차 빈틈이 없습니다!"
노인은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붉은 인삼, 즉 천하의 영약 '홍삼'을 집어 들고 한참을 넋을 잃고 들여다보더니, 이내 털썩 주저앉아 감격의 뜨거운 굵은 눈물을 왈칵 터뜨렸다.
"기적이다… 이건 하늘이 내린 기적이야! 우리 조상 대대로 입에서 입으로만 떠돌던 그 헛소리 같던 전설 속의 숙삼이 바로 눈앞에 있는 이것이구나! 처자가 기어이 해냈어. 하늘도 감복할 정성으로 기어이 이뤄내고야 말았어!"
서희 역시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미친 듯이 벅차오르는 희열과 감동을 주체할 수 없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환하게 웃음 지었다. 그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소에 넋을 빼앗긴 윤이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서희에게서 한참 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모진 풍파와 참혹한 지옥을 겪으며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버렸던 서희의 마음 한구석에도, 언제나 우직한 바위처럼 묵묵히 자신을 곁에서 지켜주고 목숨을 다해 조력해 준 윤이를 향한 따뜻하고 애틋한 연모의 감정이 서서히 싹트고 있었다.
홍삼 제조를 완벽하게 성공시킨 서희는 거기서 만족하고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최근 연로하여 기력이 쇠해진 탓에 치아가 약해져 돌처럼 딱딱한 홍삼을 씹기 힘들어하는 노인을 보며 또 다른 기발한 아이디어를 고안해냈다.
'이 귀하고 훌륭한 홍삼의 약효를 누구나 쓴맛 없이 달고 부드럽게 넘길 수 있다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얼마나 더 많은 이들에게 팔 수 있을까.'
그녀는 홍삼을 진하게 달여낸 끈적한 즙에, 윤이가 깊은 산속 바위틈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캐온 최상급 천연 토종 목청 꿀을 아낌없이 듬뿍 섞어 뭉근한 약불에 밤낮으로 오랫동안 졸이기 시작했다. 수분이 거의 날아가고 짙은 갈색의 엿기름처럼 끈적해질 무렵, 그것을 널찍한 판에 부어 서늘한 산바람에 이틀을 굳히자, 씹으면 쫀득쫀득하고 달콤하면서도 홍삼 특유의 깊고 쌉싸름한 향이 입안 가득 오랫동안 살아 숨 쉬는 '홍삼 젤리', 즉 최고급 홍삼 정과가 탄생한 것이다.
'음, 기가 막히게 달콤하면서도 속이 뜨뜻해지는구나. 몸에 쓴 한약을 질색하는 권문세가 양반네들이나, 죽 한 모금 넘기기 힘들어하는 기운 없는 노인들에게 이 홍삼 정과를 내다 판다면, 그야말로 천금을 주고서라도 앞다투어 사려 할 것이다.'
그날 밤, 은은한 은빛 달빛이 부서져 내리는 산막 앞 낡은 평상에 서희와 윤이는 나란히 걸터앉아, 쫀득한 홍삼 정과를 나누어 씹으며 밤하늘의 쏟아지는 별빛을 바라보았다. 산속의 풀벌레 소리만이 정적을 채우고 있었다.
"서희 낭자. 저는… 낭자가 정말 하늘에서 강림하신 선녀나 보살 같습니다. 다 죽어가던 낭자가 저희 산막으로 오신 후로, 평생 가난에 찌들어 흙만 파먹던 우리 부자의 삶은 매일매일이 기적을 보는 듯, 마치 아름다운 꿈을 꾸는 것만 같습니다."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윤이 도령이 아니었다면 저는 그 시린 겨울 눈밭에서 이미 흔적도 없이 목숨을 잃고 짐승의 먹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저야말로 도령과 어르신께 평생을 바쳐도 갚지 못할 크나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머뭇거리던 윤이가 용기를 내어, 약초를 캐느라 투박해지고 홍삼을 찌느라 곳곳에 화상을 입은 서희의 거칠어진 두 손을 자신의 큰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맞잡았다. 그의 손은 투박하고 굳은살이 배겨 있었지만, 그 어떤 최고급 비단보다도 보드랍고 난로처럼 따뜻하게 서희의 마음을 데워주었다.
"낭자, 저는 낭자의 과거가 무엇이든, 어떤 끔찍한 아픔과 사연을 가슴속에 품고 있든 전혀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묻지도 않겠습니다. 그저… 그저 제 곁에서 이 찬란하게 붉은 홍삼처럼 변치 않고, 평생토록 오랫동안 함께해 주신다면 이 윤이, 세상에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서희는 윤이의 서툴지만 진심이 가득 담긴 절절한 고백에 콧날이 시큰해지며 눈물이 핑 돌았다. 당장이라도 그의 넓은 품에 안겨 지난날의 모든 상처를 위로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는 아직 다스리지 못한 시퍼런 복수의 칼날이 독사처럼 똬리를 튼 채 웅크리고 있었다.
'이 착하고 듬직한 사내의 손을 잡고 이 고요한 산속에서 평범하고 행복한 아낙으로 늙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나는 잊어서는 안 된다. 억울하게 목이 잘려 나간 아버님의 그 피 맺힌 마지막 유언과 우리 가문의 원한을….'
서희는 애써 눈물을 삼키고는, 맞잡은 윤이의 손에 힘을 꽉 주며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고 흔들림 없는 형형한 눈빛으로 윤이의 눈을 깊이 마주 보았다.
"윤이 도령. 저와 함께 이 좁은 산을 내려가 한양 도성으로 가시지요. 우리가 피땀으로 만들어낸 이 붉은 황금, 홍삼을 들고 조선에서 제일 큰 저잣거리로 나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큰 장사를 시작합시다. 제가 이 홍삼으로 도령을, 그리고 저를 이 조선 팔도에서 엽전을 가장 많이 가진 제일가는 거상으로 우뚝 서게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저와 함께 그 길을 가주시겠습니까?"
무언가 세상을 다 집어삼킬 듯 굳은 결의에 찬 서희의 불타는 눈동자를 보며, 윤이는 그녀가 품은 거대한 야망의 크기를 가늠할 수는 없었으나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없이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백 년간 아무도 몰랐던 산속에 묻혀있던 붉은 황금 홍삼이, 그리고 복수를 위해 세상의 모든 부를 집어삼킬 거대한 상단 객주 서희가 마침내 세상 밖으로 거침없는 첫발을 내디딜 만반의 준비를 마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 4: 장사의 시작, 특유의 수완으로 홍삼을 독점하다
첩첩산중의 험난한 고갯길을 넘어 마침내 당도한 한양 도성의 운종가는 그야말로 눈이 돌아갈 듯한 별천지였다. 팔도 방방곡곡에서 몰려든 온갖 기이하고 진귀한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짐꾼들의 잰걸음과 상인들의 드높은 호객 소리로 거리는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북적거렸다. 십 년 전, 멸문지화를 당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포승줄에 묶여 떠났던 그 도성에, 서희는 이제 낡은 봇짐을 멘 촌부의 행색으로 다시 발을 내디뎠다. 그녀와 윤이의 등에는 지난겨울 내내 뼈를 깎는 고통을 인내하며 피땀으로 만들어낸 붉은 황금, 홍삼과 홍삼 정과가 묵직하게 매달려 있었다. 두 사람은 가장 먼저 한양에서 제일간다는 약재상들이 즐비한 골목을 돌며 조심스레 홍삼을 꺼내 보였다. 하지만 돌아오는 세상의 반응은 시베리아 벌판의 찬바람보다도 냉혹하고 차가웠다.
"이보시오, 이 시뻘겋고 돌덩이같이 딱딱한 것을 감히 천하의 영약 인삼이라고 우기는 게요? 내 평생 수십 년을 의원으로 살며 온갖 귀한 약재를 다 다루어 보았지만, 이따위로 괴상망측하고 불길한 색을 띤 요망한 것은 머리털 나고 처음 보오. 어디서 산도적 같은 것들이 굴러먹다 와서 사기를 치려 드느냐! 장난치지 말고 당장 썩 내 약방에서 나가지 못할까!"
내로라하는 으리으리한 약방의 의원들과 콧대 높은 객주들은 하나같이 붉은 인삼을 불길하고 삿된 것이라 취급하며 거들떠보지도 않고 문전박대했다. 며칠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문전박대를 당하자, 굳센 윤이마저 어깨가 축 처져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서희의 맑은 눈빛은 절망하기는커녕, 오히려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더욱 형형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어리석고 교만한 자들. 눈앞에 천하를 호령할 진정한 보물을 두고도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썩어빠진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진짜 영약을 알아보지 못하다니. 그렇다면 굳이 너희 같은 꽉 막힌 쥐새끼들에게 고개 숙이고 애원할 필요가 없지. 가장 높고 귀한 자, 목숨이 경각에 달려 천금이라도 내어놓을 자들을 직접 공략할 것이다.'
서희는 즉시 판매 전략을 완전히 뒤바꿨다. 그녀는 윤이에게 그동안 심마니 생활을 하며 모아둔 얼마 되지 않는 전 재산을 모두 털어 한양에서 가장 비싸고 화려한 최고급 비단보자기와 영롱한 빛을 발하는 옥갑을 사 오게 했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빚은 달콤하고 쫀득한 홍삼 정과를 그 옥갑에 정갈하게 담았다. 서희가 타깃으로 삼은 인물은 당시 한양에서 가장 막강한 자금력을 자랑하며 청나라 사신들과의 인삼 독점 무역을 쥐락펴락하던 역관들의 수장, 박 대방이었다. 서희는 저잣거리 국밥집을 돌며 박 대방이 앓고 있는 늙은 노모의 극심한 기력 저하로 인해 깊은 시름에 빠져 있으며, 전국 팔도의 용하다는 의원을 다 불러 모아도 백약이 무효하여 초상 치를 날만 기다리고 있다는 소문을 즙을 짜내듯 모아 둔 터였다.
먹구름이 몰려와 굵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서희는 삿갓 하나 쓰지 않고 박 대방의 화려한 팔인교 가마 앞을 목숨을 걸고 턱 하니 가로막은 채 진흙탕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가마꾼들이 호통을 쳤지만 서희는 요지부동이었다.
"대방 어르신! 어르신의 늙으신 노모께서 열흘째 곡기를 끊으시고 사경을 헤매신다 들었습니다. 천하의 구하기 힘든 명약이라 한들, 환자가 씹어 삼키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여기, 씹지 않아도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며, 죽어가는 사람의 식은 몸에 불을 지피고 기력을 되살린다는 전설 속 비방의 영약이 있습니다. 밑져야 본전 아닙니까. 속는 셈 치고 단 한 입만 어머님 입술에 올려 보시지요. 만약 효험이 없다면, 당장 관아로 끌고 가 제 목을 치셔도 달게 받겠습니다!"
빗물에 흠뻑 젖은 채로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당돌하게 외치는 서희의 번뜩이는 기개에 압도된 박 대방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가마 문을 열고 옥갑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서희의 호언장담대로 기적은 그날 밤 바로 일어났다. 숨을 헐떡이며 미음 한 모금 넘기지 못해 얼굴이 잿빛이던 노모가, 달콤하고 진한 홍삼 정과를 혀끝으로 조금씩 받아먹고는 단 하루 만에 온몸에 땀을 뻘뻘 흘리며 기력을 회복하더니 자리에서 거뜬히 일어나 밥을 찾은 것이다. 이 믿기 힘든 신비로운 소문은 발이 달린 듯 한양 도성 최고위층 양반들과 부유한 상인들, 그리고 청나라 사신들 사이로 삽시간에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갔다.
"그 붉은 보약을 당장 구해 오라! 천금을 주어도 좋고 만금을 주어도 좋으니 당장 수소문하여 그 붉은 인삼을 대령하라!"
한양 도성의 수요는 그야말로 화산처럼 폭발했지만, 홍삼을 만들 줄 아는 자는 조선 천지에 오직 서희 단 한 사람뿐이었다. 서희는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며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고, 가격을 부르는 대로 천정부지로 올렸다. 사람들은 엄청난 은자를 수레에 싣고 와 번호표를 받아들고 며칠씩 줄을 서서 홍삼을 사 갔다. 서희는 이 짧은 시간에 거둬들인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운종가 한복판에 가장 크고 화려한 기와집을 매입하여 '청구 상단'이라는 거대한 상단을 세웠다.
상단을 세우자마자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곁을 지키던 윤이에게 막대한 은자를 들려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 일대의 깊은 산속으로 파견하는 것이었다.
"전국의 모든 심마니가 모이는 장터로 가십시오. 그리고 그들에게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고 독점 매입 계약을 맺으십시오. 크기가 작든 상처가 났든, 심마니들이 목숨 걸고 캐오는 모든 밭 인삼과 산삼을 앞으로 우리 청구 상단이 가장 높은 가격으로 전부 매입하겠다고 선포하십시오. 이제 썩혀서 버릴 걱정은 영원히 접어두라고 하십시오!"
심마니 출신으로 산사람들의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윤이의 우직함과 진심 어린 설득은 전국 팔도의 헐벗은 심마니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그날 이후 조선 땅에서 나는 모든 인삼은 오직 청구 상단의 창고로만 블랙홀처럼 흘러들어왔다. 다른 거대 상단들이 배가 아파 홍삼의 제조 비법을 알아내려 첩자를 심고 혈안이 되어 온갖 짓을 다 했으나, 아홉 번을 찌고 말리는 구증구포의 미세한 땔감 조절과 계절마다 달라지는 바람의 결을 오차 없이 계산해 내는 자는 오직 서희뿐이었다.
그렇게 치열하고 숨 가쁜 십 년이라는 세월이 폭풍처럼 흘렀다. 관노비로 쫓기던 가엾은 여인은 사라지고, 서희는 어느새 조선 팔도의 모든 상권을 거미줄처럼 쥐락펴락하며, 까다롭기로 소문난 청나라 황실에까지 홍삼을 천문학적인 가격으로 독점 공급하는 명실상부 조선 최고의 거상, 천하의 '대객주'로 우뚝 서 있었다. 그녀의 말 한마디면 한양의 쌀값이 들썩였고, 그녀의 손짓 한 번에 수많은 상단이 명운을 달리했다.
※ 5: 조선 최고의 거상, 원수들의 경제적 숨통을 조이는 복수
서희의 거처이자 청구 상단의 본거지는 웬만한 사대부 정승 판서의 대감집을 아득히 능가할 만큼 거대하고 웅장한 위용을 자랑했다. 화려하게 수놓아진 십장생 비단 병풍 뒤에서 백옥 같은 손가락으로 주판알을 튕기며 장부를 넘기는 서희의 자태는 범접할 수 없는 서늘한 기품이 넘쳐흘렀다. 그녀의 곁에는 십 년 전 투박했던 심마니의 티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날카로운 장검을 찬 채 누구도 뚫을 수 없는 철통같은 호위무사이자 상단의 모든 실무를 총괄하는 대행수가 된 윤이가 그림자처럼 묵묵히 서 있었다. 조선 제일의 갑부가 되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양손에 쥐었건만, 고급스러운 비단옷을 걸친 서희의 얼굴에는 따뜻한 미소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얼음장 같은 시선은 열린 창문 너머, 한양 도성 가장 높은 명당에 기세 좋게 자리 잡은 원수 조 대감의 으리으리한 저택을 서늘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드디어 때가 무르익었다. 내 아버님의 억울한 피와 내 가문의 시신들 위태롭게 쌓아 올린 네놈의 그 추악한 권력을, 이제 내 손으로 하나씩, 아주 고통스럽고 비참하게 허물어 주마.'
십 년 전 서 대감을 모함하여 죽인 공로를 인정받아 승승장구하던 조 대감은, 현재 조정의 으뜸 벼슬인 영의정 자리에까지 올라 겉으로는 왕마저 눈치를 보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완전히 곪아 터지기 일보 직전의 썩은 고목과 다를 바 없었다. 자신의 더러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수족들을 돈으로 먹여 살려야 했고,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는 청나라 고위 관리들의 입을 막기 위해 매년 막대한 양의 은자와 비단을 뇌물로 바쳐야 했기 때문이다. 서희는 치밀한 정보망을 통해 조 대감의 그 치명적인 약점을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서희는 조 대감 일파가 은밀히 자금을 융통하는 한양과 개성의 모든 사채업자와 전주들을 막대한 돈으로 은밀히 사들여 자신의 수하로 만들었다. 그리고 조 대감이 다음 달 청나라에 바칠 뇌물을 마련하기 위해 빚을 내어 매점매석으로 폭리를 취하려 쟁여두었던 최고급 비단과 쌀을 타깃으로 삼았다. 서희는 청구 상단이 가진 무한대에 가까운 막대한 자금력을 동원하여, 청나라에서 직수입한 최고급 비단과 전라도 곡창지대에서 매입한 엄청난 양의 쌀을 전국 시장에 말도 안 되는 헐값에 한꺼번에 방출해 버렸다. 시장 가격은 단 며칠 만에 휴지 조각처럼 폭락했고, 조 대감의 뒷배를 믿고 고금리 빚을 내어 물건을 사재기했던 조 대감 측근 상인들은 줄줄이 파산하여 야반도주하거나 목을 맸다. 가장 중요한 돈줄이 완전히 말라붙자 조 대감에게 찰거머리처럼 붙어 있던 수족들은 하나둘 등을 돌려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조 대감은 빚쟁이들의 독촉과 극도의 초조함에 매일 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밤잠을 설쳤다.
"이,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이냐! 조선 천지를 호령하는 이 영의정의 창고에 은자가 다 말라붙다니! 당장 내일모레 청국 사신에게 바칠 뇌물은 어찌할 텐가! 당장 한양 바닥을 다 뒤져서라도 이자를 백 푼을 쳐줄 테니 돈을 구해오지 못할까!"
설상가상으로, 조 대감의 얄팍한 명줄을 쥐고 있는 청나라 황실의 최고위 칙사가 조선에 당도하여 대궐에서 황제의 엄중한 칙명을 내렸다. 황제의 해묵은 지병을 고치기 위해, 조선에서 나는 영약 중의 영약, 붉은 기적이라 불리는 '홍삼'을 일천 근이나 열흘 안에 바치라는 것이었다. 만약 기한 내에 이 막대한 양의 홍삼을 구하여 바치지 못하면, 조선의 영의정을 비롯한 대신들에게 그 책임을 엄히 물어 파직시키고 조선에 무역 보복을 가하겠노라 으름장을 놓았다. 그 소식을 들은 조 대감은 사색이 되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홍삼 일천 근이라니. 현재 조선 천지에서 그 어마어마한 양의 홍삼을 창고에 쌓아두고 있는 자는 오직 단 한 명, 얼굴 한 번 내비친 적 없는 신비주의의 청구 상단 대객주뿐이었다.
결국, 턱밑까지 칼날이 들어온 절박한 상황에서 자존심을 꺾은 조 대감은, 인적이 드문 깊은 밤을 타서 얼굴을 푹 숙이고 남루한 평민 차림으로 변장한 채 홀로 청구 상단의 뒷문을 두드렸다. 화려한 십장생 병풍 뒤에 그림자처럼 앉은 대객주 서희를 향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 조 대감이 굽실거리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대객주 어르신, 흠흠. 내가 바로 이 나라의 영의정 조 아무개요. 황제 폐하의 지엄하신 칙명으로 급히 최상품 홍삼 일천 근이 필요하게 되었소. 상단에서 가진 재고를 모두 넘겨주면, 내 부르는 대로 값을 넉넉히 쳐서 이자를 얹어 갚아줄 터이니. 부디 나라를 구하는 셈 치고 물건을 내어 주시오."
병풍 뒤에서 아주 느릿하고 서늘하며, 뼛속까지 파고드는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영의정 대감께서 이 늦은 밤에 누추한 장사치들의 소굴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허나 이를 어쩌지요? 우리 상단의 홍삼은 워낙 그 공정이 까다롭고 귀하여 값이 천정부지인지라, 현재 빈털터리가 되시어 빚더미에 앉은 대감께서 가진 재물로는 어림도 없을 듯합니다만. 외상이란 저희 상단 사전에 없습니다."
"무, 무엇이라! 감히 일개 천한 장사치 주제에 한 나라의 정승을 이리 능멸하느냐! 당장 창고 문을 열고 홍삼을 내놓지 않으면, 내일 아침 당장 관군을 풀어 네년의 목을 치고 상단을 쑥대밭으로 만들 것이다!"
"호오, 정당한 거래가 안 되니 이제 관의 힘을 빌려 강도로 돌변하여 억지로 빼앗으시겠다? 참으로 영의정다운 훌륭한 처사입니다. 좋습니다. 그럼 당장 제 목을 치시고, 이 세상에 오직 저만이 아는 홍삼 제조 비법도 영원히 무덤 속으로 묻어버리시지요. 그리고 대감께서는 대국 황제 폐하의 분노한 칙명과 진노를 고스란히 몸으로 감당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리하시겠습니까?"
서희의 얼음처럼 차갑고 흔들림 없는 말에, 조 대감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부들부들 떨더니 결국 바닥에 납작 엎드려 무릎을 꿇고 말았다. 지금 당장 살기 위해서는, 황제의 진노를 피해 자신의 목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홍삼이 절실했다.
"내… 내가 잘못했소. 내 생각이 짧았소. 당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대체 무엇이오? 내가 숨겨둔 금송아지요? 아니면 알짜배기 땅이오? 말만 하시오! 내 전부 내어줄 터이니 제발 그 홍삼만은 내어주시오!"
"좋습니다. 거래를 하지요. 대감께서 불법으로 차명 소유하신 전국의 모든 비옥한 토지 문서 전부, 그리고… 십 년 전, 억울한 서 대감의 필체를 교묘하게 위조하여 가짜 역모를 뒤집어씌웠던 그날의 추악한 자백이 담긴 비밀 장부. 그것들을 제게 모두 넘기십시오. 그러면 홍삼 일천 근을 수레에 실어 보내드리겠습니다."
조 대감의 탁한 눈이 극한의 공포와 경악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정체불명의 상단 대객주가, 자신과 몇몇 수하들만이 알고 있는 그 십 년 전의 끔찍한 밀실의 비밀을 어찌 이토록 정확하게 알고 있단 말인가. 하지만 당장 내일 아침 홍삼을 바치지 못하면 목이 달아날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그는, 결국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품속 깊숙이 숨겨두었던, 평생의 모든 범죄 사실이 낱낱이 적힌 비밀 장부와 전 재산이 걸린 토지 문서를 서희의 호위무사 윤이에게 넘기고 말았다.
'아버님, 구천에서 보고 계십니까. 그토록 고고한 척하던 저 오만하고 비열한 원수가 지금 한낱 장사치인 제 발밑에 개처럼 엎드려 침을 흘리며 목숨을 구걸하고 있습니다. 이제 놈이 가졌던 모든 재물과 명예를 빼앗았으니, 숨통을 완벽하게 끊어낼 마지막 일격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 6: 아버지의 억울한 누명을 벗다, 장엄한 해피엔딩
며칠 뒤, 아침 해가 밝자마자 조선의 심장부인 궐 안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혀 아수라장이 되었다. 황제의 칙명 기한을 맞추어 조 대감이 의기양양하게 청나라 칙사 앞에 대령한 수십 개의 홍삼 상자 안에는, 붉고 단단한 홍삼은커녕 습기를 머금어 시꺼멓게 썩어문드러진 악취 나는 무뿌리들만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상자를 열어본 칙사는 황제를 능멸하는 처사라며 대노하여 당장 조 대감의 목을 치라며 길길이 날뛰었고, 조정의 모든 대신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덜덜 떨며 공포에 휩싸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임금이 친히 납시어 국문장이 열렸고, 조 대감은 붉은 관복이 갈기갈기 찢긴 채 굵은 포승줄에 꽁꽁 묶여 대역죄인의 신분으로 차가운 국문장 마당에 짐승처럼 내동댕이쳐졌다.
"네 이놈, 조 아무개야! 감히 대국의 황제를 기만하고 능멸하여 나라를 멸망의 위기에 빠뜨리려 작정하였느냐! 평소 뒤에서 뇌물을 받아먹으며 국정을 농단한 것도 모자라 이젠 황제까지 속이려 들어? 저 흉악한 역적놈의 주리를 틀어 당장 배후를 밝혀내라!"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억울하옵니다, 전하! 신은 결단코 황제 폐하를 기만할 역심을 품은 적이 없사옵니다! 신은 그저 운종가의 청구 상단이라는 객주에게 엄청난 재물을 주고 홍삼을 샀건만, 그 교활한 장사치 년이 신을 철저히 속이고 썩은 무를 내어준 것이옵니다! 당장 그 요망하고 불손한 계집을 잡아들여 능지처참하여 주시옵소서!"
조 대감이 피를 토하며 변명을 늘어놓던 바로 그때였다. 무거운 궐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리더니, 최고급 옥빛 비단옷을 단정하고 기품 있게 차려입은 서희가 대행수 윤이의 호위를 받으며 티 없이 당당한 걸음으로 국문장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양손에는 조 대감이 살기 위해 직접 넘겨주었던 수십 장의 차명 토지 문서와, 십 년 전 억울한 서 대감을 죽음으로 옭아맸던 위조 문서의 원본, 그리고 그 모든 악행이 낱낱이 기록된 조 대감 친필 비밀 장부가 들려 있었다. 서희는 어좌에 앉은 임금을 향해 법도에 맞게 깊이 절을 올린 뒤, 바닥에 나뒹구는 조 대감을 향해 얼음장처럼 차갑고 멸시 어린 시선을 던졌다.
"전하, 소인 운종가에서 홍삼을 다루는 청구 상단 대객주이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십 년 전, 이 조 대감의 간악한 혀에 속아 억울하게 참수를 명하셨던 충신, 대제학 서 대감의 유일한 핏줄, 서희이옵니다!"
그 폭탄 같은 선언이 국문장에 울려 퍼지자, 궐 안의 모든 대신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며 벌집을 쑤신 듯 웅성거렸다. 임금 역시 놀라움에 자리에서 반쯤 몸을 일으켰고, 조 대감은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피투성이 유령이라도 본 듯 하얗게 질려 바닥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네, 네년이… 서 대감의 여식이라고? 십 년 전 관노비로 끌려가다 산속에서 짐승에게 뜯어 먹혀 죽었다던 네년이 살아있었단 말이냐!"
"그렇다! 짐승만도 못한 네놈이 권력과 탐욕에 눈이 멀어 청렴한 내 아버님을 모함하고 우리 가문을 도륙했던 그 피비린내 나는 섣달그믐 밤, 나는 피눈물을 삼키고 혀를 깨물며 살아남았다! 전하! 여기 이 명백한 장부들을 굽어살펴 보시옵소서! 이 장부는 조 대감이 지난 십 년간 매관매직을 일삼고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어 부당하게 축적한 재산 목록이며, 십 년 전 내 아버님의 필체를 교묘히 위조하여 거짓 역모를 꾸미고 충신들을 숙청한 모든 자백과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증좌이옵니다!"
내관을 통해 서희가 바친 장부를 건네받은 임금은, 한 장 한 장 떨리는 손으로 문서를 넘겨보더니 이내 분노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조 대감의 친필로 적힌 그 문서에는 반박할 수 없는 추악한 반역과 부정부패의 증거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이… 이 천인공노할 놈! 네놈이 정녕 짐승의 탈을 쓴 사람이더냐! 나라의 기둥 같은 충신들을 모함하여 죽이고,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은 것도 모자라 과인까지 능멸한 저 역적 조 아무개를 당장 사지가 찢어지는 능지처참에 처하고, 그 가산을 모두 적몰하여 국고로 환수하라!"
"전하! 아니 되옵니다! 살려주시옵소서! 신이 눈이 멀어 죄를 지었사옵니다! 전하!"
처절하게 발악하며 피눈물을 흘리는 조 대감이 형장으로 질질 끌려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희는 지난 십 년간 뼈에 사무치도록 참아왔던 뜨거운 눈물을 하염없이 쏟아냈다. 영하의 겨울 산을 맨발로 헤매던 고통, 숱한 실패 속에서 숯덩이 인삼을 쥐고 통곡하던 밤들이 그 눈물과 함께 말끔히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임금은 그 자리에서 즉시 서 대감의 억울한 누명을 완전히 벗기고 관직을 복권시켰으며, 명문가의 핏줄로서 나라의 위기를 넘기게 해준 서희의 지혜와 공로를 크게 치하하여 막대한 상을 내렸다.
계절이 수차례 바뀌어, 화사한 연분홍 봄꽃이 흐드러지게 만발한 산기슭. 서희와 윤이는 어느새 정갈하게 새 단장을 마친 서 대감의 웅장한 묘소 앞에 다정하게 나란히 섰다.
"아버님… 불효 여식 서희가 왔습니다. 십 년이 걸렸지만, 아버님의 억울함을 모두 풀고 가문의 명예를 되찾았습니다. 이제 그 차가운 곳에서 노여움을 푸시고 부디 편히 쉬시옵소서."
서희가 떨리는 손으로 정성껏 빚은 맑은 술잔을 묘소에 올리자, 어디선가 부드러운 봄바람이 불어와 화사한 꽃잎들이 그녀의 어깨 위로 따스하게 내려앉았다. 마치 아버지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만 같았다. 윤이가 한 발짝 다가와 서희의 가녀린 어깨를 자신의 넓은 품으로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감싸 안았다.
"이제 그 무겁고 험난했던 과거의 짐은 모두 내려놓으십시오. 복수는 끝났습니다. 앞으로 낭자의 남은 인생은 오직 낭자 자신의 온전한 행복을 위해, 그리고 부족하지만 평생을 바칠 저와 함께 의지하며 살아주십시오."
서희는 윤이의 따뜻한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지난 십 년간 단 한 번도 지어본 적 없는 세상에서 가장 환하고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거운 한을 벗어던진 두 사람은 이후로도 청구 상단을 굳건히 이끌며,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고 홍삼을 통해 병든 자들을 대가 없이 살리는 진정한 의로운 거상으로 칭송받았다. 그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조선 팔도에 영원토록 지워지지 않는 전설로 남았다.
유튜브 엔딩멘트
구독자 여러분, 역적의 딸에서 조선 최고의 객주가 된 서희의 통쾌한 이야기, 재미있게 들으셨나요? 모진 시련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기개와 붉은 홍삼처럼 진한 인과응보의 결말이 참으로 짜릿합니다. 우리 구독자님들도 서희처럼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지혜롭게 이겨내시길 바라며, 건강에 좋은 홍삼 챙겨 드시고 늘 무병장수하시길 기원합니다! 구독과 좋아요, 따뜻한 댓글 한 줄은 야담광장에 큰 힘이 됩니다. 다음에도 흥미진진한 옛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