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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종의 열네 달 만에 끝난 치세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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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트로

    스무 살의 팔팔한 젊은 임금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하룻밤 사이에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면 여러분은 믿으시겠습니까? 1469년 늦가을, 조선의 제8대 임금 예종이 왕위에 오른 지 불과 열네 달 만에 돌연 세상을 떠났습니다. 더욱 기이한 것은 실록의 기록조차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점인데요. 죽기 전날까지 신하들을 만나 정사를 돌보았다는 기록과, 발병이 위중해 손을 쓸 수 없었다는 기록이 교차하는 가운데, 임금이 눈을 감은 바로 그날 오후에 기다렸다는 듯이 열세 살 조카가 새 임금으로 즉위합니다. 노회한 권신 한명회와 철의 여인 정희왕후가 만들어낸 숨 가쁜 그날의 밤, 과연 경복궁 침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교과서에서는 결코 알려주지 않는 스무 살 임금의 미스터리한 죽음과 왕위 계승의 비밀 속으로 지금 바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씬표

    씬 1: 훈구대신들의 숨통을 죄는 스무 살의 젊은 군주, 흔들리는 공신들의 아성
    씬 2: 자정 무렵의 비밀 회동, 압구정에서 오간 한명회의 서늘한 밀담
    씬 3: 1469년 11월 28일 밤의 자경전, 엇갈리는 발병 기록과 기이한 탕약 한 사발
    씬 4: 동트기 전의 급서(急逝), 슬픔보다 빠르게 움직인 대비전과 교지
    씬 5: 서열을 뒤집은 여덟 시간 만의 즉위식, 한명회의 사위가 보위에 오르다
    씬 6: 실록의 행간에 묻힌 진실, 승자들이 기록한 열네 달의 짧은 역사

    ※ 1: 훈구대신들의 숨통을 죄는 스무 살의 젊은 군주

    1469년 시월의 끝자락, 경복궁 편전의 공기는 늦가을의 서늘한 날씨보다도 훨씬 더 차갑고 팽팽하게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용상 위에 앉은 스무 살의 젊은 임금 예종은 날카로운 눈매로 어전 바닥에 엎드린 노신들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앞에는 세조 대왕을 도와 왕위를 찬탈하고 일등 공신에 올라 조정을 쥐락펴락하던 한명회, 신숙주 등 당대 최고의 권신들이 진땀을 흘리며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습니다. 예종이 들고 있던 상소문을 용상 아래로 거칠게 내던지며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경들은 과인이 스무 살 애송이로 보이는가! 어찌하여 선왕께서 하사하신 공신전이라는 명목 아래, 백성들의 피와 땀이 서린 토지를 끝도 없이 삼키고도 모자라 국가에 바쳐야 할 세금마저 빼돌린단 말인가! 오늘 의금부에서 올라온 이 추국 문서를 보고도 할 말이 있으면 한번 고해 보라!"

    어전 바닥에 떨어진 문서가 바람에 팔락거리자, 영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한명회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습니다. 불과 일 년 전, 아버지 세조의 뒤를 이어 열아홉의 나이로 보위에 오를 때만 해도 공신들은 예종을 그저 병약하고 유약한 둘째 아들로만 여겼습니다. 일찍 세상을 떠난 형 의경세자 대신 갑작스레 세자가 되었던 터라, 조정의 실권은 당연히 원상(院相)이라 불리던 노회한 대신들의 몫이 될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예종은 공신들의 예상과 전혀 다른 군주였습니다. 한명회가 조심스럽게 옷자락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습니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선왕 대왕마마께서 창업에 버금가는 큰일을 치르시며 공신들에게 내리신 은전이옵니다. 일개 지방의 아전들과 어리석은 백성들이 공신들의 위세를 시기하여 무고한 바가 적지 않사오니, 원상들과 먼저 상의하시어 옥석을 가리심이 마땅한 줄 아옵니다."

    '요망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선왕의 이름을 팔아 과인의 눈과 귀를 가리려 드는구나. 아버님께서 만년에 너희 공신들의 비대해진 권력을 억누르려다 끝내 못다 이루고 눈을 감으셨거늘, 내 어찌 너희에게 다시 이 나라의 고삐를 맡기겠느냐.'

    예종은 속으로 차가운 분노를 삼키며 입가에 서늘한 미소를 띠었습니다. 불과 몇 달 전, 젊은 무장 남이를 역모죄로 처단할 때만 해도 예종은 한명회와 유자광 등 훈구 세력의 손을 들어주는 척했습니다. 그러나 남이가 사라지자마자 예종의 칼끝은 곧바로 공신들의 기득권을 향했습니다. 공신들이 사사로이 거느리던 반당(伴倘)이라는 사병 집단을 대폭 축소시켰고, 둔전을 백성들에게 돌려주라는 어명을 내렸으며, 급기야 원상들이 국정을 마음대로 주무르지 못하도록 왕권을 무섭게 강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상당부원군 한명회는 들으라. 선왕의 은전이 백성의 목숨보다 중하단 말인가? 과인은 이미 결단을 내렸노라. 공신이라 할지라도 법을 어기고 부당한 재물을 취한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벌에 처할 것이며, 원상들을 거치지 않고 육조가 과인에게 직접 정사를 아뢰는 친정 체제를 더욱 굳건히 할 것이다. 만일 이에 불복하는 자가 있다면, 과인은 그자를 역적으로 다스릴 것이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예종의 추상같은 호통에 대소신료들은 일제히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조회가 끝나고 경복궁 근정전 마당을 걸어 나오는 대신들의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예종이 어린 시절부터 앓아오던 발의 질환인 족질(足疾)이 있어 걸음걸이가 다소 불편하기는 했으나, 그 기개와 총명함만큼은 할아버지 세종과 아버지 세조를 빼닮아 날이 갈수록 서슬이 퍼래지고 있었습니다. 뒤따라 나오던 노신 하나가 한명회의 소맷자락을 슬쩍 당기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습니다.

    "대감, 이러다간 우리 공신들의 목줄이 남아나지 않겠습니다. 주상 전하의 기세가 날로 매서워지니, 조만간 우리 가문들의 곳간은 물론이거니와 관작까지 모두 거두어들이실 기세입니다. 게다가 전하의 춘추가 겨우 스물이니, 앞으로 수십 년을 저리 서슬 퍼런 칼날 아래서 어찌 버틴단 말입니까."

    한명회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구부정한 허리를 펴고 멀리 인왕산 너머로 기우는 붉은 노을을 응시했습니다. 가늘게 뜬 그의 눈동자 속에는 그 누구도 읽을 수 없는 깊고 시커먼 심연이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스무 살이라... 그래, 꺾이지 않는 푸른 대나무처럼 기세가 등등하시지. 허나 대나무가 제아무리 곧고 단단한들, 뿌리 밑의 흙이 파헤쳐지면 한순간에 쓰러지는 법이다. 내가 피를 묻혀가며 세운 조정이거늘, 어찌 저 젊은 임금의 손에 내 가문과 권력이 무너지는 것을 앉아서 보기만 하겠는가.'

    한명회는 말없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자신의 가마가 기다리고 있는 광화문 밖으로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걸음을 옮겼습니다.

    ※ 2: 압구정에서 오간 한명회의 서늘한 밀담

    그로부터 며칠 뒤인 십일월 하순의 어느 깊은 밤, 한강 변이 내려다보이는 한명회의 별장 압구정에는 기이한 적막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한겨울로 접어드는 강바람이 매섭게 정자의 기둥을 때리고 있었으나, 정자 안쪽 깊숙한 밀실에는 화로에 피워놓은 참숯이 붉은 열기를 토해내고 있었습니다. 한명회는 찻잔을 기울이며 맞은편에 앉은 심복의 보고를 조용히 듣고 있었습니다.

    "대감마님, 대전 내관과 내의원 의관들을 통해 알아본바, 주상 전하의 족질이 날씨가 추워지면서 다시 도지기는 하였으나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라고 하옵니다. 낮에는 편전에 나가 신하들을 인견하시고, 밤늦게까지 올라온 상소문을 일일이 친람하실 정도로 기력이 정정하시옵니다."

    심복의 보고에 한명회는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기력이 정정하시다... 그래, 스무 살의 한창때이니 발목이 조금 붓고 아픈 것이 무슨 대수겠느냐. 문제는 주상의 그 넘치는 기력이 온통 우리 훈구 공신들의 숨통을 죄는 데 쓰이고 있다는 것이지."

    "하오면 대감마님, 지난번 폐비되신 한 씨 마마의 친정 일족들이 변방으로 쫓겨난 것처럼, 대감마님께서도 주상 전하의 눈 밖에 나실까 심히 두렵사옵니다."

    한명회의 첫째 딸은 예종이 세자이던 시절 세자빈(장순왕후)으로 간택되었으나, 원손 인성대군을 낳고 산후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고, 그마저도 인성대군이 일찍 요절하면서 한명회와 예종의 인척 관계는 사실상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예종은 한명회의 라이벌 격이었던 한백륜의 딸 안순왕후를 새 왕비로 맞이하였고, 안순왕후는 얼마 전 건강한 대군(제안대군)까지 생산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한명회의 입지는 좁아지고, 한백륜 일파와 친정 체제를 구축한 예종의 세상이 열릴 것이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습니다.

    '허나 하늘이 아직 나 한명회를 버리지 않으셨지. 내게는 일찍 세상을 떠난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잘산군(성종)과 혼인한 내 넷째 딸이 있지 않은가.'

    한명회의 머릿속에는 이미 정교하고도 거대한 바둑판 하나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현재 왕위 계승 서열을 따지자면, 예종의 친아들인 네 살배기 제안대군이 일 순위였고, 만일 어린 대군을 세울 수 없다면 예종의 친형인 의경세자의 장남 월산군이 이 순위였습니다. 한명회의 사위인 열세 살의 잘산군은 서열 삼 순위에 불과했습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한명회의 사위가 용상에 오를 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심복이 주위를 살피며 목소리를 더욱 낮추어 물었습니다.

    "대감마님, 일전에 대왕대비 마마(정희왕후) 전에서 비밀리에 사람이 다녀간 뒤로 무슨 묘책이라도 서신 것이옵니까?"

    한명회의 입가에 여우 같은 미소가 스쳤습니다.

    "대왕대비 마마께서는 누구보다 총명하시고 결단력이 있으신 분이다. 주상께서 공신들을 몰아내고 선왕의 법도를 뜯어고치려 하는 것을 대비마마께서도 심히 불안해하고 계시지. 더구나 지금 중전(안순왕후)의 아비인 한백륜이 외척으로서 권력을 잡게 되면, 대비마마의 친정과 우리 공신들이 한꺼번에 뒷방 늙은이로 전락할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단 말이다."

    "하오나 주상 전하께서 저리 시퍼렇게 살아 계시는데, 대비마마의 의중이 그러한들 어찌 판을 뒤집을 수 있겠나이까."

    "사람의 목숨이라는 것이 참으로 허망한 법이지. 아무리 기골이 장대하고 기력이 넘치는 젊은이라 한들, 몸속에 흐르는 기혈이 한순간에 역류하거나, 병을 고치려 마신 약이 몸의 냉기와 부딪히면 하룻밤 새에 이슬처럼 사라지는 것이 인생 아니더냐. 선왕 시절부터 주상의 발병을 치료하던 어의가 누구였던가?"

    "그야 대감마님께서 일찍이 천거하시어 내의원에 들어간 자가 아니옵니까."

    "그래. 요즘 날씨가 부쩍 추워졌으니, 주상의 족질에 쓰는 탕약과 침술에도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할 터인데 말이다. 만일, 아주 만일이라도 주상께서 갑작스레 변고를 당하신다면, 조정은 한 치의 혼란도 없이 즉각 새 임금을 추대해야 나라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네가 오늘 밤 당장 움직여야 할 일이 있다."

    한명회는 품속에서 미리 작성해 둔 밀서 두 통을 꺼내어 심복에게 건넸습니다.

    "한 통은 대비전의 상궁을 통해 대왕대비 마마께 은밀히 올리고, 다른 한 통은 내의원 어의에게 전하거라. 밤이 깊고 강바람이 차가우니, 자국 하나 남기지 말고 그림자처럼 움직여야 할 것이다. 때가 무르익으면 세상은 단 하루 만에 바뀌는 법이니라."

    심복이 밀서를 품에 넣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한명회는 창문을 열고 시커멓게 출렁이는 한강 물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밤하늘에는 유독 붉고 불길한 기운을 띤 별 하나가 북쪽 경복궁 자경전 위에서 위태롭게 깜빡이고 있었습니다.

    ※ 3: 엇갈리는 발병 기록과 기이한 탕약 한 사발

    1469년 음력 11월 28일, 즉위 열네 달째를 맞이한 예종의 집무실에는 밤늦도록 등불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바로 전날인 11월 27일과 당일인 28일 낮까지도 예종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편전에 나아가 대신들의 보고를 받고 사형수들의 형 집행 문서를 검토하며 국정을 세밀하게 챙겼습니다. 비록 어릴 적부터 앓아온 발의 통증이 간헐적으로 찾아오긴 했으나, 스무 살의 젊은 군주가 생사를 오갈 만큼 위독한 기색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전하, 밤이 이미 삼경에 이르렀사옵니다. 내일 아침 일찍 경연이 예정되어 있사오니, 이제 그만 상소문을 덮으시고 침전으로 드시옵소서."

    대전 내관 안중경이 조심스럽게 진언하자, 예종은 뻐근한 목을 뒤로 젖히며 가벼운 기침을 내뱉었습니다.

    "허허, 내관의 말이 맞구나. 날씨가 추워지니 또다시 왼쪽 발목의 부기가 올라와 욱신거리는 것이, 오늘 밤은 일찍 자리에 누워 다리를 좀 쉬어야겠다. 내의원에서 올린 저녁 탕약은 준비되었느냐?"

    "예, 전하. 마침 어의가 전하의 족질과 기력 보강을 위해 새로이 처방한 탕약을 달여 자경전 침실에 대령해 두었사옵니다."

    예종은 내관의 부축을 받으며 어머니 정희왕후의 처소이자 자신의 침전으로 쓰고 있던 자경전 안방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보료 위에 앉은 예종은 부어오른 발목을 손으로 주무르며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이상하구나. 평소에 앓던 발병의 통증과는 어딘가 다르다. 오늘 아침부터 속이 더부룩하고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서늘한 한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 마치 몸속의 피가 얼어붙는 것만 같구나. 아직 내가 해야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이깟 병마에 발목이 잡혀서야 쓰겠는가.'

    이윽고 방 문이 열리고, 은쟁반에 받쳐진 검은 빛깔의 탕약 한 사발이 들어왔습니다. 약사발에서는 평소 맡아오던 구수한 한약재 냄새 대신, 어딘가 코끝을 톡 쏘는 듯한 알싸하고도 씁쓸한 향이 짙게 피어올랐습니다. 예종이 약사발을 받아 들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습니다.

    "이 약의 냄새가 평소 마시던 것과 사뭇 다르구나. 어의가 약재를 바꾼 것이냐?"

    방구석에 부복해 있던 어의의 등에서 식은땀 한 줄기가 소리 없이 흘러내렸습니다. 어의는 고개를 바닥에 파묻은 채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으며 대답했습니다.

    "전하, 겨울철 한기가 전하의 하초로 스며들어 족질의 부기가 심해진 것이오라, 몸의 찬 기운을 몰아내고 어혈을 단번에 풀어주는 더운 성질의 귀한 약재를 가미하였사옵니다. 약성이 다소 강하여 향이 낯설게 느껴지실 수 있으나, 드시고 나면 밤사이 땀을 내시며 통증이 씻은 듯이 가라앉을 것이옵니다."

    예종은 잠시 약사발을 들여다보다가, 의심 없이 단숨에 탕약을 들이켰습니다. 입안을 가득 채우는 끔찍하리만치 쓴맛에 예종이 미간을 구기며 빈 사발을 내려놓았습니다.

    "크으, 양약은 입에 쓰다더니 과연 그렇구나. 자, 이제 불을 물리고 모두 물러가거라. 내일 아침 일찍 육조의 판서들을 불러들여 공신전 환수 문제를 매듭지어야 하니, 묘시 초에 과인을 깨우도록 하라."

    "예, 전하. 평안한 밤 되시옵소서."

    내관과 어의가 뒷걸음질로 방을 빠져나가고 자경전의 육중한 문이 닫혔습니다. 촛불이 꺼진 어두운 침전 안에서 예종은 금침 속에 몸을 뉘었습니다. 그런데 탕약을 마신 지 채 반 식경도 지나지 않아, 예종의 뱃속에서 갑자기 불덩이가 치솟는 듯한 기이한 통증이 시작되었습니다.

    '어허, 이것이 어찌 된 일인가... 어의의 말대로 약성이 도는 것인가, 아니면...'

    처음에는 가벼운 복통처럼 시작되던 아픔은 순식간에 오장육부를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듯한 극심한 격통으로 변했습니다. 예종은 이불을 움켜쥐며 몸을 새우처럼 둥글게 말았습니다. 온몸의 혈관이 터져나갈 듯이 부풀어 오르고, 식도 끝까지 시커먼 피비린내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사람을 부르려 입을 벌렸으나, 마치 목구멍이 마비된 것처럼 컥컥거리는 신음 소리만 새어 나올 뿐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았습니다.

    "커억... 쿨럭, 게... 게 아무도 없느냐... 안 내관...!"

    예종의 손이 허공을 휘저으며 머리맡의 청동 화로를 건드려 바닥에 쓰러뜨렸습니다. 쨍그랑하는 금속음이 고요한 자경전 안을 울렸으나, 어쩐 일인지 문밖을 지키고 있어야 할 당직 내관도, 숙위 군사들도 아무도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창호지 문 너머로 누군가의 검은 그림자가 조용히 서서 방 안의 기척을 살피고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예종의 시야가 점점 흐려지고, 스무 살 젊은 군주의 손끝이 차가운 방바닥 위에서 힘없이 떨구어졌습니다.

    ※ 4: 슬픔보다 빠르게 움직인 대비전과 교지

    다음 날인 1469년 11월 29일 새벽 진시(오전 7시~9시경), 아직 궁궐의 기와지붕 위에 하얀 서리가 채 가시지도 않은 시각에 자경전 안에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통곡 소리가 아니라, 극도로 통제되고 계산된 움직임이었습니다. 주상 전하가 붕어하셨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가장 먼저 침전으로 들어선 인물은 다름 아닌 예종의 어머니인 대왕대비 정희왕후 윤씨였습니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아들의 시신 앞에서 정희왕후는 잠시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물었으나, 이내 눈물을 거두고 차가울 정도로 침착한 표정으로 돌아왔습니다. 남편 세조와 함께 피바람 부는 계유정난을 겪으며 권력의 냉혹함을 뼈저리게 체득한 여장부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정희왕후는 침전 밖에 대기하고 있던 원상 한명회와 신숙주를 즉각 불러들였습니다. 놀랍게도 두 사람은 마치 새벽부터 입궐해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정복을 완벽하게 갖춰 입은 채 자경전 대청마루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대왕대비 마마, 망극하옵니다! 어찌 이리도 허망하게..."

    한명회가 바닥에 엎드려 소매로 눈가를 훔치는 시늉을 하자, 정희왕후는 나지막하지만 위엄 있는 목소리로 그의 말을 끊었습니다.

    "상당부원군, 지금은 눈물을 흘릴 때가 아니오. 주상께서 평소에 앓으시던 족질이 밤사이 급격히 악화되어 손쓸 겨를도 없이 세상을 떠나셨소. 국상이 났다는 소식이 궐 밖으로 새어 나가면 인심이 흉흉해지고 사직이 흔들릴 것이니, 곡소리를 엄히 금하고 당장 후사를 정해야 하오!"

    '보아라, 저 철의 여인 같은 대비마마의 결단력을. 아들의 시신이 채 식기도 전에 후사를 먼저 입에 올리시다니, 과연 나와 뜻이 완벽하게 통하시는구나.'

    한명회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고개를 숙인 채 진중한 목소리로 아뢰었습니다.

    "대비마마의 말씀이 지당하옵니다. 나라가 하루라도 임금을 비워둘 수 없는 법이오니, 지체 없이 보위를 이을 새 주상을 책봉하시어 종묘사직을 안정시켜야 하옵니다. 하오나 대행왕(예종)의 원자이신 제안대군께서는 춘추가 겨우 네 살에 불과하시고, 선왕의 장손이신 월산군께서는 평소 몸이 허약하시어 대통을 잇기에 무리가 있사옵니다. 대비마마의 고견은 어떠하시옵니까?"

    그것은 이미 사전에 완벽하게 맞춰진 각본과도 같은 문답이었습니다. 조선의 종법 질서대로라면 당연히 적장자인 제안대군이나 의경세자의 장남 월산군이 왕위에 올라야 마땅했습니다. 실제로 훗날 제안대군은 아흔 살 가까이 장수했고 월산군 역시 건강하게 살았음에도,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은 '어리다'거나 '병약하다'는 이유로 단숨에 배제되었습니다. 정희왕후가 기다렸다는 듯이 비단 교지를 꺼내 들며 선언했습니다.

    "내 생각 또한 부원군과 같소. 제안대군은 아직 강보에 싸인 아기나 다름없고, 월산군은 어릴 적부터 잔병치레가 잦아 무거운 왕실의 짐을 지기 어렵소. 그러나 월산군의 아우인 잘산군(성종)은 비록 나이는 열세 살이나 기상이 영특하고 도량이 넓어 태조 대왕과 선왕(세조)을 빼닮았으니, 선왕께서도 생전에 잘산군을 기특하게 여기셨소. 이에 내가 대행왕의 유교(유언)와 내 뜻을 합하여 잘산군으로 하여금 대통을 잇게 할 것이니, 원상들은 즉시 즉위식을 거행토록 하시오!"

    "성명이 지당하옵니다! 신들이 목숨을 바쳐 새 주상을 보필하겠나이다!"

    바로 그때, 자경전 복도 끝에서 소식을 듣고 달려온 왕비 안순왕후와 그의 아버지 한백륜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뛰어 들어왔습니다.

    "어마마마! 이것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말씀이시옵니까! 전하께서 어젯밤까지도 정정하셨거늘 갑자기 승하하시다니요! 게다가 버젓이 원자(제안대군)가 살아있는데, 어찌 조카인 잘산군에게 보위를 넘기신단 말씀이옵니까!"

    안순왕후가 피를 토하듯 절규하며 매달렸으나, 한명회가 거느린 내금위 군사들이 이미 자경전 안팎을 물샐틈없이 에워싼 뒤였습니다. 한명회가 차가운 눈빛으로 한백륜을 노려보며 일갈했습니다.

    "우의정 한백륜은 들으시오! 이미 대왕대비 마마의 엄명이 내려졌거늘, 국상 중에 어디서 감히 사사로운 욕심으로 큰소리를 내어 궁궐의 법도를 어지럽히는 것이오! 여봐라, 중전마마께서 충격이 크시니 처소로 모시고, 즉위식이 끝날 때까지 그 누구도 자경전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하라!"

    예종이 숨을 거둔 지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궁궐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장악되고 있었습니다.

    ※ 5: 한명회의 사위가 보위에 오르다

    1469년 11월 29일 오후 신시(오후 3시~5시경), 경복궁 근정전에서는 조선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초고속 즉위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아침 일찍 스무 살의 임금 예종이 승하한 지 불과 여덟 시간 남짓 지난 시각이었습니다. 선왕이 승하하면 최소 수일간 빈전을 차리고 곡을 한 뒤, 왕세자나 후계자가 수차례 사양하는 의례를 거쳐 즉위하는 것이 유교 국가의 엄격한 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날 경복궁에서는 그 모든 절차가 생략되었습니다.

    근정전 마당에 도열한 대소신료들조차 아침에 갑자기 궁궐 문이 닫히고 소집령이 떨어져 영문도 모른 채 달려온 터였습니다. 관리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수군거렸습니다.

    "아니, 어제 낮까지도 편전에서 우리를 호통치시던 주상 전하께서 오늘 아침에 갑자기 붕어하셨다는 게 말이 되는가?"

    "쉬잇! 목소리를 낮추게! 지금 근정전 주변에 깔린 군사들이 모두 상당부원군 한명회 대감의 수하들이네. 게다가 방금 전 사저에 있던 잘산군께서 가마를 타고 입궐하여 곧바로 면복을 입으셨다는구먼."

    "뭐라? 원자인 제안대군도 아니고, 장남인 월산군도 아닌 잘산군께서 보위에 오르신다고? 잘산군이면 한명회 대감의 사위가 아닌가! 세상에, 임금이 돌아가신 당일에 사위를 새 임금으로 앉히다니..."

    신하들의 수군거림 속에 육중한 근정전 문이 열리고, 머리보다 훨씬 큰 면류관을 쓴 열세 살의 소년 잘산군이 한명회와 신숙주의 인도를 받으며 천천히 어도(御道)를 걸어 올라왔습니다. 소년의 얼굴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잔뜩 긴장해 있었으나, 그 뒤를 따르는 장인 한명회의 걸음걸이는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하고 위풍당당했습니다.

    '드디어, 드디어 내 사위가 저 용상 위에 앉는구나. 첫째 딸은 세자빈으로 잃었으나, 넷째 딸이 기어이 이 나라의 국모가 되고, 외손자가 대통을 잇게 될 것이다. 예종이여, 네가 제아무리 날선 칼을 휘두르며 공신들의 목을 치려 했으나, 결국 이 조정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이제야 똑똑히 보았느냐!'

    한명회는 용상 위에 앉은 어린 성종과, 그 뒤편 발 너머에 앉아 수렴청정을 시작하는 대왕대비 정희왕후를 향해 누구보다 깊고 우렁차게 만세를 불렀습니다.

    "새 주상 전하, 천세, 천세, 천천세!"

    "천세, 천세, 천천세!"

    수백 명의 신하들이 일제히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그날 오후, 한쪽 전각에서는 스무 살에 급서한 젊은 임금의 시신을 닦는 염습이 진행되고 있었고, 다른 한쪽 전각에서는 새 임금의 즉위를 축하하는 하례가 울려 퍼지는 기괴하고도 서늘한 풍경이 연출되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일은 그 직후에 벌어졌습니다. 성종이 즉위하자마자 정희왕후와 원상들은 예종이 지난 열네 달 동안 공신들을 압박하며 추진했던 개혁 조치들을 하나둘씩 백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월산군과 제안대군 측이 반발할 틈도 주지 않고, 즉위식에 참석한 모든 신하들에게 좌리공신(佐理功臣)이라는 새로운 공신 칭호와 막대한 토지, 노비를 나누어 주며 입을 틀어막았습니다. 한명회는 또다시 일등 공신의 반열에 올랐고, 두 왕을 모시며 권력의 정점에 섰습니다.

    자경전 한구석, 아무도 찾지 않는 임시 빈전에서 예종의 마지막을 지키던 늙은 내관이 향로에 향을 피우며 소리 없이 눈물을 삼켰습니다.

    '전하... 어젯밤 드셨던 그 탕약 사발은 오늘 새벽 누군가의 손에 의해 흔적도 없이 치워졌고, 어의는 오히려 새 조정에서 상을 받았사옵니다. 스무 살의 푸른 뜻을 채 펼쳐보지도 못하고 이리 허망하게 가시다니, 이 억울함을 구천에서나마 어찌 푸시렵니까...'

    연기만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빈전 밖으로, 새 시대를 맞이한 공신들의 호탕한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 6: 승자들이 기록한 열네 달의 짧은 역사

    세월이 흘러 성종 대에 이르러 편찬된 『예종실록』에는 이 미스터리한 열네 달의 역사와 예종의 죽음이 참으로 기묘하게 기록되었습니다. 실록을 편찬한 사관들과 총책임자는 다름 아닌 그날의 승자였던 신숙주와 한명회 등 훈구 대신들이었습니다.

    실록의 한 페이지에는 예종이 승하하기 전날까지도 신하들을 만나 정사를 논하고 문서를 결재했다고 또렷이 적어두었으면서도, 바로 다음 날인 승하 당일의 기록에는 갑자기 '임금이 태어날 때부터 발병(족질)이 있었는데, 근래에 병세가 심히 위중하여 마침내 자경전에서 승하하였다'라고 앞뒤가 맞지 않는 문장을 덧붙여 놓았습니다. 발병이 그리도 위중하여 죽음을 앞둔 환자가 어떻게 전날까지 정상적으로 집무를 보았는지에 대해서는 그 어떤 설명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훗날 조선 후기의 학자들과 호사가들이 남긴 야사(野史)와 필기류에서는 그날의 진실을 두고 조심스러운 의문들이 끊임없이 제기되었습니다. 어느 날 밤, 백발이 성성해진 노년의 사관 하나가 자신의 사랑방에서 제자들에게 옛 기록을 펼쳐 보이며 나지막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너희들이 읽는 실록의 글자만 보아서는 역사의 진짜 이면을 알 수 없느니라. 스무 살의 예종 대왕께서 승하하신 그날의 기록을 자세히 들여다보아라. 어찌하여 한 나라의 국왕이 별다른 전조도 없이 새벽에 눈을 감았는데, 어의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으며, 해가 지기도 전에 서열 삼 순위인 열세 살 조카가 즉위할 수 있었겠느냐."

    제자 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습니다.

    "스승님, 그렇다면 항간에 떠도는 소문처럼 정말로 훈구 공신들과 대비마마께서..."

    노사관은 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제자의 말을 막았습니다.

    "쉬잇. 증거 없는 말은 함부로 입에 담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명확한 사실은 단 하나, 예종 대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본 자가 누구였느냐는 것이다. 공신전을 몰수당하고 권력을 잃을 위기에 처했던 한명회와 공신들은 그날 하루 만에 모든 위기에서 벗어났고, 한명회의 사위가 보위에 올라 7년간의 수렴청정 동안 조정은 완벽하게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갔지."

    "하오나 스승님, 대왕대비 마마께서는 예종 대왕의 친어머니가 아니시옵니까? 아무리 권력이 중하다 한들 어찌 친아들의 죽음 앞에서 그리도 냉정하게 친손자(제안대군)를 버리고 다른 손자를 택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권력의 세계란 부자지간이나 모자지간의 정으로도 재단할 수 없는 냉혹한 곳이란다. 네 살배기 어린 손자를 왕위에 앉혔다가 외척인 한백륜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왕실이 흔들리느니, 차라리 이미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한명회와 손을 잡고 열세 살의 똑똑한 손자를 세워 자신이 직접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세조 대왕이 일군 왕실을 지키는 길이라 믿으셨던 게지. 어쩌면 그 서늘한 정치적 결단이 예종 대왕의 짧은 치세를 열네 달 만에 끝내버린 진짜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창밖으로 부는 차가운 겨울바람이 사랑방의 문풍지를 스산하게 울렸습니다. 스무 살의 나이로 강력한 왕권을 꿈꾸며 할아버지 세종과 아버지 세조의 뒤를 이으려 했던 비운의 군주 예종. 그의 죽음이 정말로 갑작스러운 병사였는지, 아니면 시퍼런 권력욕이 빚어낸 치밀한 암살이었는지는 영원한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눈을 감은 그날의 여덟 시간은 조선왕조 오백 년 역사상 가장 숨 가쁘고도 서늘했던 왕위 계승의 순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여러분, 오늘 들려드린 조선의 제8대 임금 예종의 미스터리한 죽음과 열네 달의 짧은 치세 이야기, 어떻게 들으셨나요? 죽기 전날까지 정무를 보았던 스무 살의 젊은 임금이 발병으로 급서했다는 엇갈린 기록, 그리고 숨을 거둔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서열을 뛰어넘어 한명회의 사위인 성종이 즉위한 과정은 지금 다시 살펴보아도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교과서에서는 한 줄로만 스쳐 지나가는 역사의 행간에는 이처럼 치열하고도 서늘한 권력의 암투가 숨겨져 있었는데요. 오늘 이야기가 흥미로우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 부탁드리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 댓글로 자유롭게 남겨주세요! 저는 다음 시간에도 더욱 재미있고 깊이 있는 조선야사 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 편안한 밤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