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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시험 전날, 주막 여주인과 살을 섞은 선비의 운명 (청구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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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킹멘트

    십 년을 매달린 과거시험을 단 하루 앞둔 밤. 한양 변두리 주막에 묵게 된 가난한 선비는,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주인의 유혹에 그만 이성을 잃고 맙니다. 평생의 한이 서린 시험 전날, 양기를 몽땅 빼앗긴 선비. 과연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교과서에는 절대 나오지 않는, 아찔하고도 통쾌한 조선시대 역전 드라마가 지금 시작됩니다.

    ※ 1: 낡은 봇짐과 기묘한 주막

    살을 에이는 듯한 섣달그믐의 삭풍이 한양으로 통하는 고갯마루를 매섭게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부딪혀 귀곡성 같은 소리를 내는 깊은 밤, 빛바랜 푸른 도포 자락을 여미며 걸음을 재촉하는 사내가 있었습니다. 낡아빠진 짚신 사이로 드러난 버선코는 이미 흙먼지와 진흙으로 새카맣게 물들어 있었고, 어깨에 짊어진 괴나리봇짐은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로워 보였습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십 년 세월, 어머니의 고혈을 짜내어 글공부에 매진했거늘… 이번에도 낙방한다면 나는 사람의 자식도 아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 모레 열리는 과장에서는 반드시 내 이름을 올려야만 한다.'

    사내는 얼어붙은 손을 호호 불며 주먹을 꽉 쥐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생. 몰락한 양반가의 여식으로 태어나 홀어머니 밑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세월을 견디며 오직 글공부에만 매달려온 한미한 선비였습니다. 봇짐 속에는 손때 묻은 사서삼경과, 어머니가 밤을 새워 지어주신 무명 두루마기 한 벌이 전부였습니다. 추위와 굶주림에 허덕이며 천 리 길을 걸어 마침내 한양 도성을 십 리 남짓 남겨둔 즈음, 어둠이 짙게 깔린 산모퉁이를 돌자 저 멀리서 따스한 불빛 하나가 일렁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이고, 살았다. 주막이로구나."

    얼어붙은 입술 사이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습니다. 다리를 질그릇 끌듯 하며 다가간 곳은 제법 규모가 큰 객주를 겸한 주막이었습니다. 문풍지 사이로 새어 나오는 뽀얀 김과 함께, 푹 고아낸 고깃국물 냄새가 이생의 코끝을 강하게 자극했습니다. 뱃속에서는 천둥 같은 소리가 요동을 쳤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고 들어서자, 후끈한 열기와 함께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과거를 보기 위해 전국 팔도에서 몰려든 선비들과, 물건을 떼다 파는 보부상들이 뒤엉켜 주막 안은 발 디딜 틈조차 없었습니다. 이생은 주눅이 든 채 구석의 좁은 빈자리를 찾아 봇짐을 내려놓았습니다.

    "이보시오, 주모! 여긴 국밥이 왜 이리 늦게 나오는 게요? 한양 땅 밟기도 전에 굶어 죽을 판이오!"

    "아따, 성미도 급하시긴. 가마솥에 장작불이 제 맘대로 타오르간디요? 조금만 기다려 보시랑께요."

    간드러지면서도 묘하게 힘이 있는 목소리가 주막 안을 울렸습니다. 이생이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부뚜막 앞에서 국밥을 토렴하고 있는 여주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이는 스물일여덟쯤 되었을까, 뽀얀 피부에 붉은 입술, 그리고 잔머리 하나 없이 깔끔하게 빗어 넘긴 쪽머리에 꽂힌 은비녀가 묘한 색기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여느 주막의 억척스러운 주모들과는 확연히 다른, 어딘가 기품마저 맴도는 자태였습니다. 치맛자락을 걷어붙이고 바쁘게 움직이는 그녀의 몸놀림은 유려했고, 손님들을 대하는 태도에는 여유가 넘쳤습니다.

    이생은 자신도 모르게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국밥을 퍼 담던 여주인과 이생의 시선이 허공에서 딱 마주쳤습니다. 그녀의 크고 깊은 눈망울이 이생의 남루한 행색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내 묘한 호기심이 어린 눈빛으로 변했습니다. 그녀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한 옅은 미소가 번졌습니다.

    잠시 후, 갓 끓여낸 뚝배기를 쟁반에 받쳐 든 여주인이 이생의 자리로 다가왔습니다.

    "날이 몹시 찹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지요."

    사근사근한 목소리와 함께 탁자 위에 놓인 국밥은, 다른 상에 나가는 것보다 고기 고명과 밥이 유난히 수북하게 쌓여 있었습니다. 게다가 귀한 탁주 한 사발까지 덤으로 놓여 있었습니다. 이생은 당황하여 손사래를 쳤습니다.

    "내, 내 봇짐에는 국밥 한 그릇 값밖에 없소이다. 이 술은 시킨 적이 없거늘…"

    "호호, 봇짐 가벼운 선비님들 한두 번 봅니까요? 낼모레가 과거라는데, 이 추운 날 뱃속이 든든해야 글귀라도 하나 더 떠오르지 않겠습니까. 내일 과장에 들어가시기 전에 드리는 주모의 작은 정성이니, 묻지 마시고 드시지요."

    여주인은 이생을 향해 눈웃음을 살짝 흘리더니, 이내 뒤돌아 다른 손님들에게 향했습니다. 짙은 분내와 함께 여주인이 남기고 간 온기가 이생의 얼어붙은 몸을 녹이는 듯했습니다. 국밥을 한 숟갈 뜨는 이생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습니다. 뜨끈한 국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온몸의 긴장이 탁 풀렸습니다.

    '한양에는 인심이 야박하다 들었거늘, 이리 고마운 이가 있다니…'

    그는 게눈 감추듯 국밥을 비워내고는, 달아오른 얼굴로 빈 탁주 사발을 내려놓았습니다. 배가 부르고 몸이 따뜻해지자 쏟아지는 졸음을 주체할 수 없었지만, 이생의 시선은 자꾸만 부뚜막을 오가는 여주인의 날렵한 뒷모습을 좇고 있었습니다. 내일모레면 평생의 운명이 걸린 과거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낯선 주막에서 마주친 여주인의 묘한 눈빛은 이생의 굳은 결심 한구석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 2: 시험 전날 밤의 달콤한 타락

    깊은 밤, 객상들은 하나둘씩 곯아떨어져 여기저기서 천둥 같은 코골이가 울려 퍼졌습니다. 방 안은 여러 장정들의 체온과 입김으로 훈훈하다 못해 답답할 지경이었습니다. 이생은 방구석에 쭈그려 앉아 호롱불 빛에 의지한 채 책을 펼쳐놓고 있었습니다.

    "대학지도(大學之道)는 재명명덕(在明明德)하며, 재친민(在親民)하며…"

    소리 내어 읽을 수도 없어 입술만 달싹거리며 글귀를 되뇌었지만, 머릿속은 이미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습니다. 눈앞의 활자들이 둥둥 떠다녔고, 이상하게도 자꾸만 초저녁 자신을 향해 방긋 웃어주던 여주인의 붉은 입술과 짙은 분 냄새가 어른거렸습니다.

    '내일이 결전의 날이거늘, 내 정신이 어찌 이리 혼미하단 말인가.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을 생각해서라도…'

    이생이 스스로 뺨을 가볍게 치며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을 때였습니다.

    끼익-.

    낡은 방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틈새로 찬 바람이 훅 밀려들어왔습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 이생의 눈앞에, 어둠을 뚫고 여주인이 서 있었습니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소반이 들려 있었고, 낮에 입고 있던 치마저고리 대신 얇고 하늘하늘한 밤 마실용 소복 차림이었습니다. 달빛을 등지고 선 그녀의 실루엣이 이생의 심장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었습니다.

    "아직… 깨어 계셨습니까?"

    여주인이 속삭이듯 말하며 이생의 곁으로 소리 없이 다가왔습니다. 잠든 이들을 깨우지 않으려는 듯, 그녀의 발걸음은 고양이처럼 가벼웠습니다. 그녀가 이생의 무릎 앞쪽으로 바싹 다가앉자, 희미한 호롱불 아래로 그녀의 뽀얀 목덜미가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어찌, 이 야심한 시각에 주모께서…"

    "방이 좁아 불편하시지는 않나 노심초사하다, 불빛이 새어 나오길래 와 보았습니다. 책방 도령님들 과거 길에 진이 다 빠지실 텐데, 요기라도 좀 하시라구요."

    소반 위에는 따뜻하게 데운 정종 한 병과 잣을 띄운 꿀물이 놓여 있었습니다. 이생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습니다.

    "내일이 시험이라, 더 이상 술을 입에 댈 수는 없소. 마음만 받겠소이다."

    이생이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소반을 밀어내려 하자, 여주인이 그의 손등 위로 자신의 부드러운 손을 포개어 얹었습니다. 차가운 이생의 손등에 닿은 그녀의 체온은 불덩이처럼 뜨거웠습니다. 이생은 화들짝 놀라 손을 빼려 했으나, 여주인은 오히려 그의 손을 살며시 쥐어왔습니다.

    "과거 급제가 어찌 책 속의 글귀로만 되겠습니까. 하늘의 운이 닿고, 사람의 기운이 차올라야 하는 법이지요. 긴장된 속을 데우는 데는 이 따뜻한 술 한 잔이 명약이랍니다."

    그녀가 직접 술잔을 들어 이생의 입가로 가져갔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향기와 함께, 여주인의 숨결이 이생의 뺨에 닿을 듯 가까워졌습니다. 그녀의 크고 젖은 눈동자를 가까이서 마주한 순간, 이생은 머릿속에서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이성의 끈이 툭 하고 끊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홀린 듯 잔을 받아 단숨에 비워낸 이생. 독한 술기운이 식도를 타고 단전으로 퍼져나가자, 그동안 억눌러왔던 욕망이 활화산처럼 솟구쳐 올랐습니다.

    '안 된다… 양기를 보존해야 하거늘… 이러다간 십 년 공부가 하루아침에 무너진다…'

    머리는 맹렬히 경고하고 있었지만, 몸은 달랐습니다. 여주인이 빈 잔을 내려놓고는 이생의 굳은 어깨를 가만히 쓸어내렸습니다.

    "서방님, 십 년 세월 서책과 씨름하느라 몸도 마음도 꽁꽁 얼어붙으셨군요. 오늘 밤만큼은 제가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해드리겠습니다."

    "주모… 나는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선비요. 내일 낙방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흙을 파먹고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처지인데, 어찌 내게 이러시오."

    "사내의 앞길은 한 치 앞도 모르는 법. 제 눈에는 서방님이 장차 정승 판서라도 되실 귀한 분으로 보입니다."

    여주인의 붉은 입술이 이생의 거친 입술에 포개어졌습니다. 십 년간 여인네의 손길 한 번 타보지 못하고 글공부에만 갇혀 살았던 이생이었습니다. 참았던 숨을 토해내듯, 이생은 이내 여주인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습니다. 차디찬 방바닥 한구석에서, 남들 몰래 숨죽여 나누는 두 사람의 밀회는 그 어떤 불꽃보다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낡은 책들은 방구석으로 밀려났고, 시험에 대한 압박감도, 내일의 두려움도 모두 여주인의 부드러운 살결 속으로 녹아내렸습니다. 평생을 지켜온 선비의 꼿꼿한 절개가 주막집 여주인의 달콤한 유혹 앞에서 맥없이 무너져 내린, 참으로 아득하고도 황홀한 밤이었습니다.

    ※ 3: 주모의 입에서 나온 백성의 눈물

    폭풍 같았던 격정이 휩쓸고 간 자리. 문풍지를 흔드는 바람 소리만이 요란한 가운데, 두 사람은 좁은 요 위에 서로의 몸을 의지한 채 누워 있었습니다.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운 적막 속에서, 여주인은 이생의 단단한 가슴팍에 머리를 기댄 채 가늘고 고운 손가락으로 그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습니다.

    이생은 천장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온몸의 기운이 쏙 빠져나간 듯 나른하고 평온했지만, 그와 동시에 엄청난 후회가 해일처럼 밀려들었습니다.

    '아아, 나는 끝났다. 이토록 허망하게 정기를 쏟아붓고 말다니… 내일 과거장에서 붓이나 제대로 쥘 수 있을까. 어머님, 불효자를 용서하십시오.'

    그의 복잡한 심경을 읽기라도 한 듯, 여주인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습니다.

    "어찌 그리 수심이 깊으십니까. 밤새 이년의 온기를 취하고서도, 머릿속은 온통 내일 치를 과거 생각뿐이신가 봅니다."

    "…부끄럽소. 십 년을 매달려 온 일이거늘, 고작 하루를 참지 못하고 내 이리 짐승 같은 짓을 벌였으니. 하늘이 나를 어찌 보겠소."

    이생의 자책에 여주인은 작게 소리 내어 웃었습니다. 비웃음이 아닌, 무언가 통달한 듯한 씁쓸한 웃음이었습니다.

    "서방님. 서책에 쓰인 성현의 말씀은 분명 귀한 것이겠지요. 허나, 세상천지가 어찌 그 책장 안의 글귀대로만 돌아가겠습니까? 서방님이 내일 장원급제를 하여 벼슬아치가 된다면, 백성들을 위해 가장 먼저 무엇을 하시렵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이생은 당황했습니다. 그는 한 번도 벼슬아치가 된 이후의 '현실 정치'를 깊이 고민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공자와 맹자의 도리를 읊으며 임금께 충성하겠다는 막연한 생각뿐이었습니다.

    "그, 그거야… 임금님의 덕화(德化)가 널리 퍼지도록 예(禮)와 악(樂)을 바로 세우고, 백성들이 오륜(五倫)을 지키며 살도록 교화할 것이오."

    여주인은 이생의 가슴에 올려두었던 손을 거두더니 몸을 일으켜 앉았습니다. 희미한 달빛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방금 전까지 요염하게 교태를 부리던 주모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딘가 깊은 슬픔과 분노가 서린, 서늘하고 단호한 표정이었습니다.

    "예와 악이요? 서방님, 사흘을 내리 굶어 뱃가죽이 등에 붙은 백성에게 공자맹자를 읊어주면 배가 부르답니까? 지금 조선 천지의 백성들이 왜 죽어 나가는지 진정 모르신단 말입니까?"

    "무,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이 주막은 팔도강산에서 몰려드는 장사치와 쫓기는 백성들이 모이는 곳이지요. 여기서 제가 듣고 보는 세상은 서방님의 책 속과는 지옥처럼 다릅니다. 서방님, '황구첨정(黃口簽丁)'과 '백골징포(白骨徵布)'를 아십니까?"

    이생은 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책에서 읽은 적은 있으나, 그것이 현실에서 얼마나 끔찍하게 벌어지고 있는지 알 턱이 없었습니다.

    "군포(軍布)를 낼 돈이 없어 갓난쟁이 입에 젖을 물리기도 전에 관아에서 들이닥쳐 군적에 올려버리고, 무덤 속에 누워 뼈만 남은 시아비의 이름까지 군적에 올려 베를 짜내라며 매질을 합니다. 견디다 못한 지어미가 목을 매고, 지아비는 자신의 양물을 스스로 잘라내며 통곡하는 곳이 바로 이 땅입니다! 고을 수령들은 창고에 쌓인 환곡(還穀)에 모래와 겨를 섞어 백성에게 고리로 빌려주고, 가을이 되면 온전한 쌀로 열 배를 뜯어가지요. 살아남기 위해 야반도주하여 화전민이 된 자들만이 산속에서 짐승처럼 목숨을 부지하고 있습니다."

    여주인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서려 있었습니다. 이생은 숨을 죽인 채 그녀의 입술만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진정… 백성들의 삶이 그토록 참혹하단 말이오?"

    "서방님이 내일 과장에 앉아 써 내려가야 할 글은, 구름 잡는 예악(禮樂)이 아닙니다.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삼정(三政)의 문란을 어찌 끊어낼 것인지, 굶주린 이들의 입에 어떻게 쌀알을 넣어줄 것인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그 방책을 써내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목민관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충격이었습니다. 평생 서당 방구석에 앉아 고서만 파고들던 이생에게, 주막 여주인이 쏟아내는 생생한 민정(民情)의 고통은 벼락처럼 그의 정수리를 내리쳤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백성의 현실도 모르면서 어찌 나라의 녹을 먹으려 했는지 뼈저린 부끄러움이 몰려왔습니다.

    이생은 몸을 일으켜 정좌하고는 여주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습니다. 유혹에 넘어갔다는 자책감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습니다. 이 밤, 그는 창부가 아닌 진정한 세상을 만난 것입니다. 밤이 깊도록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백성들이 처한 참혹한 현실과 이를 구제할 방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생의 머릿속에는 십 년 동안 읽었던 수천 권의 책보다, 오늘 밤 여주인이 들려준 눈물 어린 이야기들이 깊고 뚜렷하게 새겨지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창밖으로 동이 트며 푸스름한 새벽빛이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 4: 기적처럼 내걸린 시제

    어느덧 창호지 너머로 희뿌연 새벽 동이 터오고 있었습니다. 밤새도록 몰아치던 섣달그믐의 삭풍도 새벽빛 앞에서는 기세를 한풀 꺾은 듯, 문풍지를 흔드는 소리가 제법 잦아들어 있었습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닭 울음소리가 고요한 주막의 아침을 깨우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이생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습니다. 비록 하룻밤의 격정으로 인해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고 뼈마디가 욱신거렸으나, 그의 두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맑고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고개를 돌려 방안을 찬찬히 살펴보았지만, 지난밤 자신을 옴짝달싹 못 하게 유혹했던 묘령의 주모, 아니, 썩어빠진 세상을 예리하게 꿰뚫어 보던 지혜로운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습니다. 마치 한여름 밤의 서늘하고도 황홀한 꿈을 꾼 것은 아닌가 싶어 멍하니 앉아있던 이생의 시선이, 이내 자신이 덮고 자던 낡은 이불깃 위로 머물렀습니다.

    그곳에는 간밤에 여인이 남기고 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습니다. 흙먼지가 묻어 꾀죄죄했던 이생의 낡은 무명 두루마기가 어느새 밤새 빨고 풀을 먹여 다듬이질까지 한 듯 정갈하게 개켜져 있었고, 그 옆에는 아직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는 주먹밥 두 덩이가 깨끗한 명주 보자기에 고이 싸여 있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이생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습니다. 가난한 선비의 남루한 행색을 비웃지 않고, 오히려 큰 뜻을 품은 사내로 대우해주며 과거장으로 향하는 길을 이토록 정성스레 배웅해준 여인의 깊은 속내에 그저 목이 메일 뿐이었습니다.

    '내 반드시 살아있는 글을 쓰고 오리라. 죽어가는 백성들을 살릴 수 있는, 피 끓는 문장을 지어 임금께 바치리라. 그리하여 그대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내가 되어 다시 돌아오겠노라.'

    결연한 의지를 다지며 정갈해진 두루마기를 차려입고 봇짐을 단단히 고쳐 맨 이생은,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고갯길을 넘어 한양 도성으로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이윽고 당도한 경복궁 앞 육조거리와 과장(科場) 앞마당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평생을 서당에 갇혀 붓만 쥐고 살아온 전국 팔도의 선비들이 수천 명이나 몰려들어, 두꺼운 솜옷을 껴입고도 매서운 칼바람에 연신 몸을 움츠리며 달달 떨고 있었습니다. 저마다 봇짐에서 책을 꺼내 마지막으로 사서삼경의 구절을 중얼거리는 소리가 마치 수만 마리의 벌 떼가 우는 것처럼 웅웅거렸습니다.

    이생은 왁자지껄한 틈바구니 속을 헤집고 들어가 적당한 자리를 찾은 뒤, 가져온 낡은 돗자리를 펴고 차분히 가부좌를 틀고 앉았습니다. 꽁꽁 언 손을 입김으로 호호 녹여가며 먹을 갈기 시작하자, 진한 묵향이 코끝을 스치며 미친 듯이 요동치던 마음이 맑은 호수처럼 가라앉았습니다. 주변 선비들의 얼굴에는 긴장감과 초조함, 그리고 혹여나 자신이 보지 못한 경전의 구석진 곳에서 시제가 나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역력했습니다. 다들 주희의 집주를 달달 외우며 태평성대의 예악을 머릿속에 욱여넣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이생 역시 예전 같았으면 남들과 똑같이 머릿속으로 맹자의 장구를 외우며 벌벌 떨고 있었겠지만, 오늘따라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뿐이었습니다. 굶주림에 지쳐 쓰러진 백성들의 퀭한 눈망울, 그리고 억울함을 토로하며 눈물을 삼키던 여주인의 낭랑하고도 한 맺힌 목소리만이 귓가를 맴돌고 있었습니다.

    둥! 둥! 둥! 둥!

    마침내 과장의 거대한 문이 굳게 닫히고, 과거 시험의 시작을 엄숙하게 알리는 육중한 대고(大鼓)의 북소리가 궁궐의 담장을 넘어 도성 하늘로 세 번 크게 울려 퍼졌습니다. 장내를 채우던 수천 명의 숨소리조차 일순간에 멎어버렸습니다. 모든 선비들의 시선이 전면에 높이 솟은 단상 위로 쏠렸습니다. 이윽고 화려한 붉은 관복을 차려입은 시험관이 위엄 있는 걸음으로 걸어 나와, 양옆의 나졸들의 호위를 받으며 둥글게 말린 커다란 족자를 촤르륵 펼쳐 내렸습니다. 차가운 아침 바람에 거세게 나부끼는 하얀 비단 위로, 굵고 힘찬 필체의 한자들이 그 압도적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 순간, 수천 명의 선비들이 운집한 넓은 마당에는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무겁고 당혹스러운 정적이 짓눌렀습니다. 이내 곳곳에서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헛기숨 들이켜는 소리와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시제란 말인가! 경전의 구절이 아니지 않은가!"
    "어찌 이리 난해한 것을 물으신단 말인가. 내 평생 공맹의 도리를 그리 파고들었거늘!"

    시제(試題)는 선비들이 밤낮으로 파고들던 사서삼경의 심오한 철학도 아니었고, 태평성대를 구가하기 위한 예(禮)와 악(樂)의 고상한 도리도 아니었습니다. 족자에 적힌 글귀는 날카로운 비수와도 같았습니다.

    [ 救民生之急 破三政之亂 (구민생지급 파삼정지란) : 백성의 삶을 구제할 시급한 방도를 논하고, 삼정(三政)의 문란을 타파할 실질적인 계책을 아뢰어라. ]

    평생을 글공부만 하던 온실 속의 선비들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시제였습니다. 고을 수령들의 탐학이나 환곡의 폐단, 군포의 모순 같은 것은 성현의 책 속에는 한 줄도 나오지 않는 조선 팔도 현실의 진흙탕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선비들은 잔뜩 벼린 붓을 든 채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기 시작했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글을 풀어가야 할지, 현실 정치의 폐단을 어찌 감히 붓끝에 올릴지 막막해하며 붓을 꺾고 탄식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하지만 이생은 달랐습니다. 족자에 적힌 글귀를 눈으로 확인한 순간, 그의 등줄기를 타고 강렬한 전율이 번개처럼 짜릿하게 내리꽂혔습니다.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고 호흡이 가빠지는 거대한 충격 속에서, 그는 멍하니 허공에 나부끼는 시제만을 뚫어져라 응시했습니다.

    '이럴 수가… 세상에 어찌 이런 기적이 일어난단 말인가! 지난밤, 그녀가 내 가슴을 치며 피를 토하듯 들려주었던 바로 그 이야기가 아니더냐!'

    마치 하늘이 오직 자신 한 사람을 위해, 아니, 지옥 같은 세상에서 죽어가는 백성들의 피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그 주막 여주인을 천사(天使)로 둔갑시켜 내려보낸 것만 같았습니다. 양기를 잃어 시험을 망칠 것이라며 가슴을 치고 자책했던 간밤의 일들이, 사실은 장원급제를 향해 하늘이 내려준 가장 완벽한 계시이자 축복이었음을 뼛속 깊이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생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붓대를 움켜쥐었습니다. 눈앞에 새하얀 화선지가 쫙 펼쳐지고, 이내 그의 머릿속에서는 십 년 동안 깎고 다듬어온 유려한 문장력과, 여주인이 생생하게 들려준 처절한 백성의 현실이 톱니바퀴처럼 완벽하게 맞물려 폭발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거침없이 먹물을 듬뿍 찍어 올린 이생의 붓은 화선지 위를 한 마리 용처럼 내달렸습니다.

    황구첨정(黃口簽丁)과 백골징포(白骨徵布)로 인해 젖먹이 아이와 무덤 속 시아비의 군포까지 물어내야만 하는 백성들의 절규를 담았습니다. 견디다 못해 스스로 양물을 자르는 지아비의 통곡을 핏빛 문장으로 고발했고, 관아의 창고에 쌓인 환곡에 모래와 겨를 섞어 백성에게 고리로 빌려주고 열 배로 뜯어가는 탐관오리들의 악행을 적나라하게 난도질했습니다. 더 나아가, 부패한 수령들을 엄벌로 다스리고 조세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여 농민들의 숨통을 틔워주어야 한다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방략들을 거침없이 쏟아냈습니다. 그의 붓끝에서는 가식적인 공리공론이나 아첨하는 글귀가 아닌, 펄떡펄떡 살아 숨 쉬는 생명력과 뜨거운 애민(愛民)의 절규가 살아 숨 쉬고 있었습니다.

    매서운 과장의 찬 바람 속에서도 이생의 이마에는 어느새 굵은 땀방울이 비 오듯 맺혀 흘러내렸습니다. 주위의 선비들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있을 때, 이생은 쉴 새 없이 먹을 갈아내며 화선지를 가득 채워 나갔습니다. 마침내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쾅 하고 찍어 내리는 순간, 그의 가슴은 당장이라도 터질 듯 벅차올랐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과거 답안지가 아니었습니다. 썩어빠진 세상을 향해 벼락처럼 던지는, 가난한 선비와 주막 여인이 함께 써 내려간 한 편의 웅장한 출사표이자 구원(救援)의 선언이었습니다.

    ※ 5: 어사화를 꽂은 장원급제자

    과거 시험이 끝나고 며칠 뒤, 한양 도성 전체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방방례(放榜禮)의 함성으로 들썩였습니다. 궐문 앞 널따란 광장에는 시험 결과를 보기 위해 수많은 구경꾼들과 선비들의 가족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고, 궁중 악대인 장악원이 연주하는 궁중 음악이 하늘에 닿을 듯 장엄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오색찬란한 궁중 깃발들이 맑은 겨울 하늘 아래 거센 바람에 나부끼며 참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붉은 홍포(紅袍)를 입고 머리에 화려한 어사화를 꽂은 서른세 명의 급제자들이 임금이 친히 내리는 교지를 받들기 위해 숨을 죽인 채 도열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랑스러운 대열의 가장 앞자리, 눈부시게 늘어진 어사화의 꽃가지를 흔들며 세상 누구보다 당당하게 서 있는 장원급제자(壯元及第者)는 다름 아닌 이생이었습니다.

    이생이 바친 시권(試券: 과거 답안지)은 채점을 맡은 고관대작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친히 받아 읽어본 임금의 용안마저 붉게 상기시키며 눈시울을 적시게 만들었습니다. 조정의 대신들이 모인 편전에서 이생의 글을 소리 내어 읽게 한 임금은, 글이 끝나는 순간 무릎을 강하게 치며 찬탄을 금치 못했다고 전해졌습니다.

    "과연 훌륭하고 또 훌륭하도다! 서책의 해묵은 먼지 속에서 허우적대며 남의 글이나 흉내 내는 가식적인 문장이 아니로다. 내 십수 년 동안 무수한 선비들의 글을 보았으나, 이토록 백성의 고혈과 눈물을 생생하게 담아내어 짐의 가슴을 찌르는 글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노라! 삼정의 문란을 개탄하며 그 구체적인 타파 방책까지 내놓았으니, 이야말로 진정 백성의 고통을 어루만질 줄 아는 참된 목민관의 재목이 아니겠느냐! 당장 이 글을 쓴 자를 이번 과장의 장원으로 삼도록 하라!"

    한미한 시골 양반가 출신의,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가난한 선비가 내로라하는 권문세가와 공신들의 자제들을 모조리 실력으로 짓누르고 당당히 장원을 차지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장안 최고의 화젯거리가 되었습니다. 찢어진 도포 자락을 입고 짚신을 끌던 사내가 하루아침에 나라 제일의 인재로 우뚝 선 것입니다. 낙양의 지가를 올리듯, 고위 대신들과 정승 판서들은 앞다투어 이생이 머무는 낡은 객주로 사람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든 전도유망하고 임금의 총애를 받는 젊은 천재를 자신들의 사위로 삼아, 가문의 위세를 더욱 드높이고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산해진미가 담긴 예물 상자를 들고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중매쟁이들이 이생의 숙소 문지방이 달도록 드나들며 온갖 감언이설로 유혹했지만, 이생은 흔들림 없이 꼿꼿한 자세로 그들의 빗발치는 청혼을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대감마님들께서 이처럼 보잘것없는 소생을 귀히 여겨주시니 그 은혜가 하늘과 같사오나, 제게는 이미 평생을 함께하기로 하늘에 맹세한 짝이 있습니다. 부디 제 뜻을 헤아려 돌아가 주시옵소서."

    그는 부귀영화와 출세가 보장된 탄탄대로의 꽃길을 마다하고, 오직 단 한 사람만을 가슴에 품고 있었습니다. 그 추웠던 밤, 꽁꽁 언 자신의 손을 잡아주며 세상의 이치를 깨우쳐 주었던 붉은 입술의 여주인. 그녀가 아니었다면 오늘 자신은 여전히 남몰래 낙방의 눈물을 삼키며 고향으로 향하는 패배자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이윽고 궁궐에서 하사받은 눈부신 어사화를 머리에 꽂고, 임금의 어명이 적힌 홍패를 가슴에 품은 채 은빛 안장이 얹힌 백마에 올라탄 이생은 유가(遊街: 급제자가 풍악을 울리며 거리를 도는 축하 행렬)의 행렬을 이끌고 당당히 한양 성문을 나섰습니다. 수십 명의 광대들이 징과 꽹과리, 날라리를 불어대며 요란하게 풍악을 울려 퍼뜨리는 가운데, 장원급제자를 태운 백마는 한양의 번화가를 벗어나 거침없이 남쪽 외곽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구경꾼들은 화려한 어사 행렬이 왜 고관대작들이 모여 사는 북촌의 으리으리한 고래등 기와집들이 아닌, 흙먼지 날리고 인적도 드문 변두리의 초라한 고갯마루를 향해 쏜살같이 가는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그러나 장원급제자의 행차가 신기하여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환호성을 지르며 그 행렬의 뒤를 졸졸 따라붙었습니다.

    백마 위에서 말고삐를 쥔 이생의 심장은 금방이라도 밖으로 튀어나올 듯 미친 듯이 뛰고 있었습니다. 십 년 동안 가슴에 맺혔던 한을 풀고 세상의 정점에 섰다는 짜릿한 성취감보다, 당장이라도 하루빨리 그녀의 고운 얼굴을 보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온몸을 뜨겁게 휘감고 있었습니다. 불과 며칠 전, 봇짐 하나 달랑 메고 밑창이 다 떨어진 짚신을 질그릇 끌듯 질질 끌며 뼛속까지 시린 추위에 떨며 걸었던 그 험하고 길었던 고갯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어사화를 흩날리며 백마를 타고 달리는 이생에게는 그 길이 왜 이리도 짧고 가볍게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드디어 저 멀리 산모퉁이를 돌자, 이생의 두 눈에 너무나도 익숙한 주막의 정경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바람에 기우뚱거리는 낡은 초가지붕과 흙바람이 날리던 널따란 마당, 다 쓰러져가는 울타리, 그리고 커다란 가마솥에서 쉴 새 없이 피어오르던 뽀얗고 구수한 고깃국물 냄새까지 모든 것이 며칠 전 그가 떠나온 그대로였습니다. 이생은 백마의 고삐를 더욱 힘차게 당겨 채찍질하며, 흙먼지를 거세게 일으키고 주막 앞마당으로 벼락 치듯 들이닥쳤습니다.

    "이리 오너라! 이 주막의 주모는 어디에 계시느냐!"

    행렬을 호위하며 기세를 올리던 광대들의 풍악 소리가 이생의 손짓 한 번에 뚝 멎고, 우렁차고도 단호한 호통 소리가 조그만 주막 전체를 뒤흔들었습니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기세등등한 어사 행렬의 등장에, 평화롭게 국밥을 떠먹으며 탁주를 들이켜던 장사치들과 객상들은 사색이 되어 들고 있던 숟가락을 집어 던진 채 바닥에 납작 엎드렸습니다. 부뚜막에서 불을 때며 고기를 삶던 찬모들도 귀신이라도 본 듯 기절할 듯 놀라 바닥에 주저앉아 벌벌 떨었습니다. 그야말로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팽팽한 적막이 마당에 감도는 가운데, 삐이걱-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 있던 주막 안채의 낡은 방문이 서서히 열렸습니다. 과연, 그 문 너머로 이생이 그토록 사무치게 그리워하던 이가 모습을 드러낼 것인지 마당에 엎드린 모든 이들의 숨 막히는 시선이 그곳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 6: 정실부인이 된 주모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안채의 문이 열리고, 하얀 무명 앞치마를 두른 채 소매를 걷어붙인 주막 여주인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밖에서 들려온 요란한 풍악 소리와 쩌렁쩌렁한 호통에 놀라다 못해 창백해진 얼굴이었습니다. 그녀는 앞치마에 황급히 젖은 손을 닦으며, 뽀얀 흙먼지를 일으키고 마당 한가운데 산처럼 버티고 선 거대한 백마와 그 위에 올라앉은 붉은 관복 차림의 사내를 올려다보았습니다.

    눈부시게 찰랑이는 어사화 너머로, 자신을 뚫어지게 내려다보는 사내의 낯익은 얼굴을 확인한 순간이었습니다. 여주인의 크고 맑은 눈망울이 거센 풍랑을 만난 조각배처럼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움에 벌어진 그녀의 입술 사이로 가쁜 숨결만이 새어 나올 뿐, 들고 있던 커다란 나무 국자가 바닥으로 툭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음에도 그녀는 미동조차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돌부처처럼 굳어버렸습니다.

    "서… 서방님…? 정녕, 서방님이십니까…?"

    여주인의 붉은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도무지 이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기가 가득 밴 쉰 목소리가 새어 나왔습니다. 불과 며칠 전이었습니다. 꽁꽁 언 손으로 다 식어빠진 국밥을 떠먹으며 초라한 봇짐을 안고 방구석에서 한숨 푹푹 짓던,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연약하고 가난했던 선비. 자신의 품에 안겨 과거 시험에 대한 두려움에 눈물을 글썽이던 그 사내가, 이제는 천하를 호령할 듯 늠름한 자태의 장원급제자가 되어 붉은 관복을 펄럭이며 자신 앞에 당당히 나타난 것입니다.

    말 위에서 그녀의 젖은 눈동자를 자애롭게 바라보던 이생은, 지체 없이 백마에서 훌쩍 뛰어내렸습니다.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다가간 그는 주위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시선이나 체면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아 있는 여주인 앞의 흙바닥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거칠어진 그녀의 두 손을 자신의 커다란 두 손으로 덥석 부여잡았습니다. 차갑게 식어있던 그녀의 손끝에서 미세하게 전해지는 떨림과 온기가, 지난밤 서로의 체온을 나누었던 그 뜨거웠던 기억을 고스란히 이생의 뇌리로 되살려냈습니다.

    "내가 왔소. 그 밤 당신에게 약조한 대로, 내 이리 어사화를 꽂고 금의환향하여 당신을 데리러 왔단 말이오."

    이생의 다정하고도 굳건한 목소리를 듣자, 여주인은 그제야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의 끈이 툭 끊어지며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아이고, 나리… 어찌, 어찌 이 미천한 주막 년을 잊지 않으시고 이 냄새나는 곳까지 귀한 발걸음을 하셨사옵니까. 천한 년의 몸을 탐하고 망발을 들은 것이 행여 나리의 창창한 앞길에 오점이라도 될까, 이년은 나리가 떠나신 그 날부터 부처님 앞에 물 한 그릇 떠놓고 그저 밤낮으로 나리의 무사 급제만을 빌고 또 빌었사옵니다."

    여주인의 고운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구슬처럼 뚝뚝 떨어져 이생의 손등을 뜨겁게 적셨습니다. 양반과 천민, 반상의 법도가 하늘과 땅 차이보다 크고 무서웠던 조선 사회였습니다. 하룻밤의 풋사랑이나 끓어오르는 욕정으로 기생이나 주모를 품는 양반네들은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수없이 많았지만, 당당히 장원급제를 하고 금의환향한 사내가 그 천한 주막의 여주인을 잊지 않고 이토록 화려한 행차를 이끌고 다시 찾아오는 일은 건국 이래 전대미문의 기적이자 파격이었습니다.

    이생은 소매를 끌어당겨 그녀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다루듯 다정하게 닦아주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체면을 차리려는 가식도 없는 굳건하고도 절대적인 애정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내 목숨이 붙어있는 한, 두 번 다시 스스로를 미천한 주막 년이라 낮추어 부르지 마시오. 당신은 비천한 여인이 아니오. 꽉 막힌 서책에만 빠져 세상천지도 모르던 이 못난 사내를 진정한 선비의 길로 일깨워 준 나의 위대한 스승이자, 내 평생을 바쳐 머리 숙여 사랑할 유일무이한 여인이오. 그날 밤 당신이 핏대를 세워가며 들려준 백성들의 피눈물이 아니었다면, 오늘 내 머리 위에 얹힌 이 빛나는 어사화는 결단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오. 이 영광은 오로지 당신이 만들어준 것이오."

    이생의 진심이 뚝뚝 묻어나는 절절한 고백에, 주막 앞마당에 바짝 엎드려 숨을 죽이고 있던 구경꾼들과 단골손님들 사이에서 헉하는 놀라움과 함께 감탄의 탄성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신분제의 무거운 굴레를 박차고 일어나 서로의 영혼을 구원한 두 사람의 이 아름답고도 극적인 재회는, 그 어떤 광대들의 연희보다도 백성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울리는 명장면이었습니다.

    이생은 자리에서 늠름하게 일어나 눈물짓는 여주인의 좁은 어깨를 강하게 감싸 안고는, 마당에 모인 수많은 구경꾼들과 만천하가 모두 똑똑히 들으라는 듯 산이 울리도록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여기 모인 모든 백성들은 똑똑히 들으라! 나 이생은! 금은보화를 싸 들고 찾아온 고관대작들의 수많은 규수를 모두 마다하고, 오늘 이 자리에서 세상의 참된 이치를 가르쳐준 이 여인을 나의 하나뿐인 정실부인(正室夫人)으로 맞이할 것을 하늘과 땅의 신령들 앞에 엄숙히 맹세하노라!"

    그 폭풍같이 당당한 선언에, 잠시 넋을 잃고 있던 광대들은 신이 나서 더욱 기세 좋게 태평소를 불어 젖히고 꽹과리를 부서져라 두드렸습니다. 엎드려 있던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너나 할 것 없이 두 손을 번쩍 치켜들며 환호성을 지르고 뜨거운 박수를 치며 두 사람의 기적 같은 앞날을 진심으로 축복했습니다. 천출이라는 가혹한 운명 때문에 평생을 뭇 사내들의 희롱을 견디고 숨죽여 살며 세상의 온갖 풍파를 맨몸으로 이겨내야 했던 여주인은, 마침내 이생의 넓고 따스한 가슴팍에 얼굴을 깊이 묻은 채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엉엉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것은 지난날의 모진 설움과 아픔이 모두 씻겨 내려가는, 그리고 새로운 삶의 시작을 알리는 벅찬 환희의 눈물이었습니다.

    이후 한양으로 올라온 이생은 숱한 양반가 어르신들의 매서운 뒷말과 조정 대신들의 질시 섞인 비난 속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고 주모를 자신의 정실부인으로 당당히 맞아들여 백년해로를 약속했습니다. 부인의 남다른 내조와 세상을 꿰뚫어 보는 지혜에 힘입어 본격적인 벼슬길에 오른 이생은, 그저 탁상공론에 빠져 파벌 싸움이나 일삼는 여느 관리들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그는 암행어사가 되어 전국 팔도를 샅샅이 누비며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부패한 탐관오리들을 가차 없이 처벌하여 옥사로 보냈고,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아 굶주린 백성들의 구휼에 앞장서는 조선 최고의 명 재상으로 칭송받게 됩니다. 가난에 찌든 선비와 천한 주막 여주인의 하룻밤 인연이 빚어낸 이 통쾌하고도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신분 사회의 억압을 뚫고 피어난 진정한 인간 승리의 기록으로서 오늘날까지도 민초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팍팍하고 고단한 삶에 짜릿한 위안과 희망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시험 전날 밤의 달콤한 타락이 오히려 인생 역전의 열쇠가 될 줄이야, 참으로 하늘의 묘한 장난 같지 않나요? 신분을 뛰어넘어 진정한 사랑과 백성을 향한 뜻을 이룬 이생 부부의 통쾌한 이야기였습니다. 오늘 들려드린 <조선 야사록>이 재미있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꾹 눌러주시고요! 다음 이 시간에도 교과서에서는 절대 알려주지 않는, 더 쫄깃하고 발칙한 역사 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